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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림 Nov 15. 2024

드라마 ‘정년이’가 지운 여성의 리얼리즘

한 사람을 지운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삭제하는 일이다.

오리지널 콘텐츠를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매체로 활용해 신작의 리스크를 중리는 IP 활용 방식은 OSMU(One-Source Multi Use)는 이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드라마의 기획 방식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원작을 성공적으로 활용하는 데의 관건은 '원작의 팬덤을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는가?'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팬덤을 만족시킨 성공 사례가 얼마나 되는가에는 대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네이버 웹툰 <정년이>를 활용한 드라마 <정년이>도 같은 수순을 걷게 됐다. 회차가 지날수록 고공행진하고 있는 두 자릿수 시청률과는 별개로, 원작의 팬덤 사이에서 원작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반응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웹툰 <정년이>는 1950년대 중반, 서울로 상경해 국극 배우로 도전하는 소리 천재 정년이(김태리 분)의 이야기를 담아낸 웹툰이다. 정년이의 성장은 물론이고, 여성 국극이라는 소재 속에서 연대를 통해 함께 성장하는 국극단 간판 스타 문옥경, 라이벌 허영서 등 입체적인 주인공들이 원작의 매력 포인트다. 그렇다면 드라마 <정년이>가 지운 원작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퀴어 서사다.


부용과 퀴어 서사 



가장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음에도 퀴어 서사와 함께 삭제된 인물이 있다. 바로 '부용'이다. 권부용은 여성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로 정년이의 1호 팬이자 친구를 넘어 로맨스를 그려내는 인물이다. 원작 속 여성 국극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권부용의 대본을 작품화하기도 하는데, 당시 대본 속에 묘사된 여성들이 서로 '멋있는 사랑'을 하는 장면이 여성 국극의 인기를 재견인하기도 한다.


독공을 하다 목이 부러져, 소리를 그만둔 정년을 다시 극단으로 데려온 것도 부용이다. 정년과 함께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을 단순히 시청자가 '영서'와의 경쟁 구도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삭제했다는 제작진의 의도는 다소 비약해 보일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의식


출처: 여성국극제작소  


1950년대 해방 이후 여성들이 모여서 시작한 창극인, '여성 국극'은 남성들로만 짜여진 국극 세계에 저항하며 탄생했다. 이를 소재로 삼고 있는 만큼, 원작은 가부장제라는 구조적 문제를 꼬집고 있다. 부용의 엄마, 이경자는 남편이자 극작가인 권영섭에게 글을 빼앗긴 채 '고스트 라이터'로 살아간다. 남편에게 글을 빼앗긴 그는 괴로워하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데, 가부장제 아래 제 이름과 업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는 당대 여성을 상징하면서도 대표하는 캐릭터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의 노름빚을 갚기 위해 국극단의 횡령을 모른 채 할 수 밖에 없는 혜랑, 남편에게 가정 폭력 피해자 패트리샤의 서사 또한 드라마에서는 모두 변형됐다. 캐릭터를 넘어 가부장제를 비판적으로 재현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은 여성 국극이라는 소재 '자체'의 의미가 퇴색된 지점이다.


오랜 기간 동안, 여성 캐릭터들은 주도적인 남성 캐릭터의 서사를 부수적으로 뒷받침 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흥행 보증수표'라고 일컫는 배우들 또한 대부분 남성이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며 극의 중심이 되는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부터,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2018)까지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꾸준히 투쟁해온 여성 캐릭터들 덕에, 실존 여성들이 두텁게 존재해 왔던 계층과 소외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문을 열고 나온 현재, 여성 서사와 캐릭터들은 계층을 뛰어 넘은 새로운 성취를 보여줄 차례다.


이때, 새로운 성취는 지난한 논쟁을 뚫고 탄생한다. 미디어는 현실에 앞서 이러한 논쟁의 장과 아젠다를 제시하는 역할을 함에도, 페미니즘과 성 소수자라는 논쟁적 요소를 배제한 <정년이> 제작진의 의도를 통해 레거시 미디어와 드라마의 한계를 체감하게 된다. 정년은 "무대에 선다는 건 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세계를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원작에 충실해야 할 작품에서, 한 사람과 한 세계를 지우고, 여성 서사에서 여성의 현실을 지운 드라마 '정년이'가 아쉬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해당 글의 원문은 문화예술플랫폼이자 언론사 '아트인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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