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으로만 20대의 절반이 지나간 한 맺힌 수능 이야기
항상 이 맘 때가 되면 기분이 묘하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시기, 코트를 계속 입어야 할지 패딩을 꺼내야 할지 고민되는 시기, 낙엽이 지고 첫눈이 올랑 말랑 하는 그런 시기.
여기에 하나 더, '수능 한파'라며 온갖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시기.
사실 내가 묘하다고 했던 건 앞에 언급한 것들보다는 수능에 더 근거한 감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 맘 때가 되면 수능이 왔다는 걸 제대로 실감했던 것 같다.
수능 감독이나 제자들 응원으로 새벽같이 출근했던 엄마 때문일수도 있고, TV나 신문 때문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곧 겪을 일이기에 한 해 한 해 지나갈수록 더욱 내 일처럼 받아들였던 게 크지 않았나 싶다.
사람이란 참 자기중심적이라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 같던 수능이 이제는 정말 남 일처럼 느껴진다.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 같은 경우는 수학능력시험에 대해서 조금은 민감한 입장이다.
적어도 보통의 어른들보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더니 일종의 한(恨)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난 왠지 모르게 서울이 끌렸다.
중학생 때 친구들이랑 옷 사러 동대문 가고 명동 가고 그랬었는데 그냥 북적이는 그곳이 좋았다.
(후에 서울에 살아보니까 북적이는 거... 음... 사양하겠다. 요즘은 한적한 게 훨씬 좋다.)
워낙에 브랜드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아서 번화한 거리만 돌아다녀도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되곤 했다.
나름 중학교 다닐 땐 성적이 꽤 잘 나왔기에 서울에 있는 누구나 알만한 대학교에 입학하는 게 허황된 꿈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는 달랐다.
시골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착각에 잘 빠지는데 아무리 학교 규모가 크더라도 평균성적은 서울이나 대도시 학교들에 크게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가 한 학년에 400여 명은 됐으니 군 단위 학교 치고는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여기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면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내가 초등학생이던 90년대 중반 무렵 다큐 프로그램에 나왔을 정도로 유명한 학교였다.
공부 잘하는 걸로?
그럴 리가...
무려 '추적 60분'이라는 명 프로그램에 '학교폭력'을 주제로 다루어졌었다.
참 대단한 학교이지 않나.
그런 학교에서 상위권이라는건 큰 의미 없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중학교 때도 참 공부를 안 했다.
어차피 시험 전 날에만 바짝 훑어봐도 꽤 괜찮은 성적이 나오는데 평소에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애들이 그만큼 안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다른 곳이었다.
같은 도시에 있는 학교지만 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 적어도 시험기간에는 공부를 하는 애들이 모인 것이다.
물론 우리 고등학교가 시내에서나 잘하는 거지 대외적으로 보면 뛰어날 정도로 좋은 성적을 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밑천이 드러난 거다.
그럼에도 밑천은 드러났지만 공부는 하지 않았다.
공부하는 습관 자체가 안 들어있으니 몰아치기할 때 말고는 몸이 책상에 붙어있는 것 자체가 힘들더라.
많은 고등학생들이 공감할 사실인데 밑천이 드러나도 이상은 저만치에 가있다.
고3 여름방학이나 되어야 조금씩 현실적으로 보인다.
사실 그때 보는 것도 꽤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점수대다.
나 또한 당시 세차게 불던 '의치한약'열풍에 충실히 떠밀려 최소 약대, 최대 한의대라는 지나가던 개도 노잼이라며 웃지도 않고 지나갈 목표 설정을 하기에 이른다.
뭐 목표를 크게 잡는 게 나쁜 건 아닌데 문제는 수학적, 과학적 머리가 제로에 가까운 내가 이과를 갔다는 데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의 선택이 맞지 않았던 게 설령 내가 기적을 일으켜 의약계열 학과에 입학했다면 적응도 힘들었을 뿐더러 과연 졸업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1년 반을 허비한 끝에 고3 여름방학 때 문과 전향이라는 초강수를 꺼내 든다.
0대 2로 뒤지고 있는 축구경기에서 후반 44분에 모든 수비수를 빼고 공격수를 집어넣는 듯한 절박한 카드였다.
그리고 9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이 카드가 먹혀들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봤다.
생전 보지도 않았던 사회탐구에서 3지리(한국지리, 세계지리, 경제지리)가 1등급이 뜬 데다 나름 이과에서 수Ⅱ에 미적 하던 놈이라 수리영역에서 2등급이 뜬 것이다.
생전 과학탐구에서 2등급 받기도 힘들었고, 수학에선 3등급만 나와도 대박이었던 내가!!!
기적적으로 교체 투입된 타깃형 장신 스트라이커가 코너킥 상황에서 한 골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마무리 잘하고, 약간씩 보강만 한다면 동점골도 들어갈 것 같았다.
그리고 수능 날.
동점골은 없었다.
보통 2점 차로 지고 있는 경기는 잘 안 뒤집어진다.
간혹 드라마 같은 경기가 뇌리에 박힐 뿐이지 통계를 보면 무난히 끝나거나 오히려 골을 더 먹고 끝나는 경기가 더 많다.
난 그나마 초강수가 통해서 한 골 따라간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던 그런 경기가 나의 첫 수능이었다.
이제 입시 시즌이 다가왔다.
본 경기만큼이나 중요한,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야구나 농구의 포스트시즌 같은 시기다.
본 경기는 잘 못했으니 포스트시즌이라도 잘 치러야 한다.
(물론 실제 스포츠에선 정규시즌을 못하면 포스트시즌은 기회도 주어지지 않지만...)
부모님이 요구했던 것은 법학과에 가서 공무원, 법무사와 같은 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법을 배우는 게 그런 시험에는 도움이 될 테니.
음... 십 년이 더 지난 일이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고등학생의 난 딱히 어른이 되어하고 싶었던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고로 부모님의 요구에 맞서 싸울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요구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일정 수준 이상의 학교가 아니라면 서울에 보내주지 않겠다는 것.
굳이 비싼 돈 내고 서울에서 생활하느니 집에서 통학할 수있는 학교에 가라는 뜻이었다.
사실 난 이게 더 힘들었다.
집을 벗어나고 싶었고, 시골을 벗어나고 싶었고,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던 막연한 바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질 위기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법학과의 성적은 어느 학교든 인문계열 학과들 중에 꽤나 높은 편이었다.
나는 정규시즌을 못치렀으니 포스트시즌이라도 열심히 해야 했다.
매일매일 입시 관련 사이트와 커뮤니티를 오가며 밤새 정보를 구했다.
참 웃긴 게 그 열정으로 공부를 했다면 친구들처럼 해방감을 느끼며 밤거리를 누비고 다녔을텐데...
이게 뭐하는건가 싶었다.
과를 제한하니까 선택의 폭이 꽤나 좁아졌다.
결국 서울 중하위권 법대 2곳과 지방에 있는 학교의 법대 1곳 이렇게 지원했다.(학교의 수준이 중하위라는 게 아니라 당시 수능 성적이 그랬다는 뜻. 오해마시기를.)
결과는 서울 한 곳과 지방 한 곳에 합격했다.
앞서 말한 대로 선택은 뻔하지 않나.
집에서 다닐 수 있는 지방의 학교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당시 서울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 학교가 나도 썩 마음에 안 들었고, 19살의 나는 지극히 부모님에 순종적이고, 기를 못 펴던 쫄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후자의 이유가 커서 전자의 이유로 나 자신을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법대를 가지 않겠다는 의견을 내고, 어떻게든 서울로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이런 감정상태로 학교에 입학했으니 학교 생활이 원활했을 리가...
최종적으로 불합격했던 학교의 입결 여부를 기다리느라 오리엔테이션도 안 갔고, 당시엔 가뜩이나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했기에 학교에 적응하기란 너무 힘들었다.
개강총회니 뭐니 이런데도 쫓아가 봤지만 버스를 일찍 타고 와야 하는 장거리 통학의 특성상 사람들과 가까워지기도 어려웠고, 기존에 친해진 그룹에 끼는 건 가뜩이나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그 땐 혼자 밥을 먹는 것조차도 힘든 나였다.
거기에 더해 법학이라는 학문은 나와 정말 맞지 않았다.
여린 멘탈을 가진 스무 살의 나는 참 울기도 많이 울었다.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한 친구의 문자를 받은 날 저녁엔 특히나 가슴이 아렸다.
상위권 학교라는 사실 보다도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정말로 행복하게 놀고 있다는 사실이 내 처지와 더 비교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고3 때보다도 더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이 훌쩍 넘는 통학길에 올라야 했으니까.
그렇게 3월 하고 2주쯤 지났던 어느 날, 아버지랑 차를 타고 가다가 문득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반수 하는 애들이 우리 학교에 참 많다는 얘기.
그 날 교실에서 우연히 반수를 계획하는 친구들의 얘기가 귀에 흘러들었다.
그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수능이 끝나고 이미 재수는 안된다고 못이 박힌 상태였기에.
그런데 아빠가 툭 하고 던졌다.
"너도 하고 싶으면 해."
아빠도 느꼈을 것이다.
매일 표정 썩어가지고 학교 가고, 갔다 오면 더 썩어있었던게 내 일상이니.
순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덥석 물었다.
우리 집의 실권자는 엄마라 엄마의 확답이 떨어져야 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재수에 가있었다.
이번엔 어떻게든 내 의지대로 한다.
그 날이 계기가 되어 내 인생은 아니, 내 멘탈은 완전히 달라진다.
멘탈이 달라졌으니 인생은 따라서 바뀔 수밖에.
독학으로 재수를 시작했지만 두어 달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서울에 있는 학원을 한 번만 보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솔직히 안 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 허락이 떨어졌고, 그렇게 나의 첫 홀로 서울 살이가 시작되었다.
쓰다 보니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남이 보기 편하게 썼다면 이렇게 안 썼겠지만 저 스스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어서 스크롤의 압박이 상당해졌네요...
남은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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