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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질척거리는 수능이야기 2

수능으로만 20대의 절반이 지나간 한 맺힌 수능 이야기

by 유턴

지난 회에 이어서...




생전 외박이라곤 해본 적 없는 내가 스무살하고 여름이 되어서야 바깥 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살고 싶었던 서울에서 말이다.

다만 서울살이의 시작이 재수였다는 것이 기존에 꿈꾸던 로망과는 많이 달랐지만...

사실 그래도 좋았던 게 당시의 심정이었다.


물론 초반부터 좋지는 않았다.

겁 많은 부모님의 과잉보호하에 어느 덕후의 장식장 속에 모셔져있는 피규어마냥 살았던 20년이었다.

그렇다고 또 오냐오냐 사랑만받으며 크지는 않았던 것이 지금의 알다가도 모를 희한한 성격의 나와 내 동생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교사였던 어머니는 성적에 유독 민감했고, 어릴 때는 가끔 맞기도 중학생 이후로는 말로 참 많이 맞았다.)

어찌됬든 그런 피규어가 세상 밖으로 나오자 연약하디 연약한 플라스틱 물질에 불과했다.

화장실이 방에 있고, 비록 수학의 정석만한 사이즈지만 창문이 있던 꽤 괜찮은 고시원을 저렴하게 구했지만 당시만해도 괜찮은 고시원이든 안 괜찮은 고시원이든 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차에 짐을 싣고 도착한 첫 날, 부모님이 떠나고 나서의 감정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마냥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항상 서울을 그려왔지만 내가 생각했던 모습도 아니거니와 혼자 이 낯설고 두려운 공간에서 내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나에 대한 일종의 불신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날 밤, 다음 날 있을 송파 스카이에듀학원의 반수반 오리엔테이션에 가기위해 다리를 온전히 펼 수 없는 침대에 억지로 누웠다.

성격상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지독한 불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얕은 잠이라도 들던 찰나 누군가 내 방문을 열쇠로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나 강렬해 소리입자가 고막을 통과하기도 전에 전두엽을 때리는 듯했다.

보통 이렇게 전개되는 얘기는 대부분 꿈이지만 내 얘기는 꿈이 아니었다.

정말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첫 날부터 이렇게 강도를 맞고, 서울 살이의 꿈을 펼치지도 못한채 저승 살이를 하는 것인가...'

별 생각이 다들었던 몇 초가 흘렀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 그래도 한 판 붙어나 볼까, 그럼 의자부터 들고 찍어야하나...'


그런데 다시 3초정도 흐른 후 충분히 칼이든 뭐든 들고 침입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들리는 티비소리.


그랬다.

그건 바로 내 옆방의 누군가가 방에 들어오기 위해 열쇠로 문을 연 것이었다.

식은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던 그 순간이 허무했다.

하지만 안도했다.

정말 방음이 그 정도로 안 됬던 것이다.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려도 이게 내 오른쪽 방인지 내 왼쪽 방인지 도무지 알 수없는 곳, 설령 실제로 내 방에 누군가 털러 온다고 해도 내 방이구나 하고 확신할 수 없는 그 곳이 바로 고시원이었다.


그렇게 초반 1주일 정도는 모든게 어색했다.

누군가 밥을 차려주지 않는 것도, 이 작은 방만이 내가 사용가능한 공간인 것도, 학원에서 생전 처음 만난 타 지역애들도, 그 외에도 모든 것이...

부모님이 주시고간 현찰도 누가 볼까, 누가 훔쳐갈까 트렁크 안에 넣고 쓰곤 했을 정도로 스무살 여름의 나는 어리숙했고, 겁쟁이였다.

첫 주는 금요일이 되자마자 고시원에서 하면 됬을 빨래마저도 바리바리 싸들고 집으로 내려갔다.


다시 시작된 서울 살이 2주차 무렵...

내가 뭔가 이상하다.

이 생활이 적응 되기 시작하는 거다.

어? 근데 또 약간 재밌어지네?

난 몰랐다.

내가 그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난줄은.


그런데 공부하러 모인 재수학원이 재밌어지면 안됬다.

4주차쯤이었나 고향에서 홀로 재수중인 친구마저 학원 추가모집 기간에 소환했다.

그리고 난 서울살이에 흠뻑빠지게 되었다.

그 무서웠던 고시원 방은 이전에도 가질 수 없었던 오로지 독립된 내 공간이었고, 고시원이 있던 송파동 일대는 모르는데가 없는 내 동네가 되었으며, 낯설기만 했던 전국에서 모인 애들은 만나기만 하면 낄낄대고 떠드는 친구들이 되었다.

이 때 처음으로 월드컵경기장가서 축구도 봤고, 걸으면 5분거리에 있는 탐앤탐스에서 커피도 자주 마셨다.

당시만해도 커피전문점이 지금처럼 온 동네방네 있던 시절이 아니라 서울에서 대학을 다님에도 카페한 번 가보지 않은 내 고향친구들도 많았다.


주객이 전도되도 제대로 된 것이다.

공부하러 온 서울에서 눈이 띄이고, 마음이 열려버렸고, 겁을 상실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좋아하는 여자도 생겼다.

이 시기가 내 성격과 인생을 바꾼 시기임에는 분명했지만 당연히 재수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공부를 안했던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와 다를 것 없이 했던 게 문제였지.

결국 1년전의 성적표에 잉크를 묻혀 데칼코마니를 찍어낸 것 같은 결과를 받아들고, 조금 더 극단적인 원서질을 하기에 이른다.

(가)군: 서울 중하위권 학교 경영학과(고3때 합격한 학교와 비슷한 학교지만 다른 학과)

(나)군: 극 상향지원이지만 마지막까지 눈치지원에 최근 5년간의 통계까지 살펴본 결과 빵꾸가 날 것 같은 과를 잘 집어냄. 서울 상위권학교, 비인기학과.

(다)군: 지방국립대 중 하위권 학교 심리학과. 셋 중 가장 안 땡기지만 붙는다면 어쩔수 없이 가야했기에 학비싼 국립대에 전공만큼은 내가 원했던 심리학과 선택.


결과는.................?


3패였다.


아주 자만에 자만을 했는데 보기 좋은 실패였다.

가끔 노력한 것에 비해 좋은 결과를 받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건 몇몇 운 좋은 애들 얘기고, 대다수는 안 하면 결과도 없다.


음.................이제..........슬슬 막막해졌다.............

정말 문닫고 간다는 2월 말도 지나 3월이 되어갔다.

선택을 해야했다.


여전히 자퇴했던 학교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한 번 더 지원을 요청하고 싶지도 않고, 당장 삼수를 할 마음가짐이 안되어있다.

그래, 영장나온김에 군대나 갔다오자.




7월에 예정된 입대를 하기로 했다.

그제서야 친구들도 좀 만나고, 수영도 하고, 헬스도 잠깐 다녔다.

조용히 4개월여간을 보내고 지금은 사라진 의정부 306보충대로 떠났다.


그리고 착실히 돈을 모았다.

월급, 친척이나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 어릴 때 부터 모아온 돈까지.

연습게임삼아 2008년 11월 휴가를 쓰고, 시험을 한 번 더 봤다.

결과는 큰 기대를 안했지만 역시나 큰 기대 안하길 잘했다.

그래, 곧 전역이고, 그 때부터 달리면 되니까.


2009년 5월말, 마지막 휴가들을 싸그리 모아서 썼다.

말년휴가는 딱히 놀고 싶은 감정도 안 생긴다고들 하는데 나 또한 그랬다.

할 일이 많았으니까.

당장 전역하자마자 다닐 학원을 서울에서 알아봐야하고, 근처의 고시원도 알아봐야 했다.

당시만해도 난다긴다 하는 애들은 죄다 강남 대성학원으로 모였다.

그 외에 강남 메가스터디, 서초 메가스터디, 강북 청솔학원, 강남 청솔학원 등등이 유명했던걸로 기억한다.

사실 죄다 줄여서 부르곤 했다.

강대, 강메, 서메, 북청, 남청 이런식으로...

그런데 이 학원들은 반수반을 잘 모집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존에 있던 반에 결원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대기번호를 발급하고, 그 순위에 따라 학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나마도 전에 봤던 수능이 일정 수준이상을 기록해야했고.

가뜩이나 2년동안 머리도 굳은데다가 11월까지 몇 개월 남지않아 대기리스트에 들어갈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이 학원 저 학원 연락을 하던 중 희망이 보였다.

당시 대성학원에서 파이를 확장하기 위해 강남 마이맥 대성학원이라는 일종의 강남 대성 동생뻘되는 학원을 런칭했었다.

그 학원에서 입학시험을 치른 다는 소식을 알아냈다.

시험을 통해 현재 결원이 생긴 인원만큼을 뽑고, 각 반에 배치한다는 계획이었다.

다행히 휴가기간에 시험이 있어서 시험을 치르고, 합격소식까지 들었다.

마이맥 대성 또한 서울교대 근처라 숙소잡기는 쉽지 않았다.

고시원 가격이 군대가있는 동안 많이 오르기도 했고, 강남쪽이 특히 비싸기도 했다.

내가 모은 돈으로만 수능을 치러야했기에 비싼 곳은 갈 수 없었고, 싼 곳은 시설이 너무했다 싶을 만큼 안 좋았다.

결국 전에 재수를 위해 머물렀던 나의 사랑, 먼지없는 송파로 가기로 했다.

동네도 좋았고, 고시원도 가성비 최고라 아침에 이동이 좀 힘들더라도 이 쪽이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숙소까지 확보해 놓고, 휴가에서 복귀했다.

2009년 6월 5일, 오지 않을 것 같던 전역날이 찾아왔지만 내 마음은 온통 수능에 가 있었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짐싸들고, 서울로 올라갔던 것 같다.

다들 전역하면 엄청 놀아제끼는데 나 또한 안 놀고 싶었을까... 그냥 참고 올라갔다.


드디어 3번째 수험생 생활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듯 낯선 생활의 첫 날, 학원에서 두 가지에 놀랐다.

첫 번째는 한 반에 이렇게나 많은 수강생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야간 자율학습이 말 그대로 자율이었다는 점이었다.

송파 스카이에듀를 다닐 땐 그리 크지 않은 교실에 40여명 정도가 한 반이었다면 여긴 대충봐도 70~80여명은 되보였다.

이런 대 강의실에 기껏 한 두명 발생한 결원을 채우는 것이었으니 내 자리도 좋을리 만무했다.

자리가 완전 맨 앞 첫 줄이었는데 여기까지는 '공부열심히 하면 되지 뭐'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문제는 출입문 바로 앞이라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시선두기 민망했고, 선생님을 바라보는 각이 축구에서 코너킥 찰 때의 각도와 비슷했다.

게다가 공부하러 온 거라지만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상태로 점심식사를 하는 기분이 참 묘했다.

가뜩이나 전역하고 싱숭생숭한 상태로 서울에 올라왔는데 이래저래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차라리 자율학습이 강제였다면 남아서 어찌어찌 공부했을텐데 정말 자유로운 학습시간이라 꽤 많은 학생들이 나가는걸 보고도 그 자리에 앉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방으로 돌아왔고, 근처의 송파여성회관 독서실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이렇게 1주일이 흐르니까 뭔가 비효율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별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와 함께 전역했던 고향친구중 한 명 또한 수능을 보려 했는데 서울로 올라올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원래 같이 올라오려고 했었지만 친구는 약간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이후에도 자주 연락을 주고 받으며 빨리 오라고 재촉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 친구가 다닐만한 학원을 알아봤는데 마이맥 대성은 한동안 학생을 충원할 뜻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대성학원 홈페이지를 들락날락하다가 송파에 있는 대성학원에서 반수반을 아예 새로 만든다는 광고를 보았다.


'오~ 이거 보여주고, 후딱 오라고 꼬셔봐야겠다.'

처음엔 이 생각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 그냥 나도 옮길까?' 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바로 송파 대성에 전화를 걸었고, 난 시험도 이미 봤으니 그냥 오면 된다고 했다.

'아 그래, 잘 됬다.'

이번엔 마이맥 대성에 전화를 걸어 환불여부를 물었고, 생각보다 많이 환불해준다는 답변을 들었다.

내가 보통은 느릿느릿한데 이런 일처리는 또 순식간이다.

다음 날 마이맥으로 가 환불처리를 완료하고, 송파 대성에 등록도 하고 왔다.

그리곤 며칠 있다가 친구도 내가 살고 있는 고시원으로 오게되었고,

이제 본격적인 삼수의 막이 올랐다.



결국 세 번째 편까지 가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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