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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질척거리는 수능이야기 마지막

나의 옛날 수능이야기지만 지금 수험생들이 꼭 봤으면 좋겠는 이야기

by 유턴

전 편에 이어서...






당시 2개의 반이 신설되었는데 난 마이맥 시험에 붙었다는 이유로 운 좋게 살짝 상위의 반에 속했고, 친구는 다른 반에 들어갔다.

여기서는 친구와 갈라져도 괜찮았던게 다들 새로 온 입장이라 모두가 다 어색어색, 뻘쭘뻘쭘한 상황이었다.

그 때 나이 스물 셋, 대부분 동생들의 나이가 스물아니면 스물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23이라는 숫자도 참 주름하나 없는 어린티 팍팍나는 나이인데 동생들은 나를 참 어려워했다.

그 땐 이게 이해가 잘 안갔었는데 스물 넷에 갔던 필리핀에서 스물 아홉, 서른의 형, 누나들을 진심으로 어려워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재수학원의 동생들이 백번 이해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그 어려움은 녹아 없어졌다.

특유의 말빨로 동생들과 친해졌고, 애들이 나를 편하게 대해줬다.

막 전역했을 때라 여자인간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했다.

그렇다고 재수 때처럼 즐기기만 했던 학원생활은 아니었다.

내 돈쓴다는 게, 나이많다는 게 진정 무서운 일이라 태어나 가장 열심히 공부했었다.

주말에도 학원에 나왔고, 하물며 그 자체가 괴롭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면 다 친한 애들이 있으니 공부하고 나서 점심 한 끼, 저녁 한 끼하는 것 또한 소소한 재미였다.

그리고 석촌역에서 문정역까지 고작 세 개역에 불과해 통학에 무리가 없었던 것도 한 몫했다.


신종플루가 막 유행하기 직전이었는데 아마도 내가 앓던 병이 신종플루가 맞지 않았을까 싶다.

한 여름 어느 날은 고시원에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고열에 끙끙 앓다가 병원이 열자마자 혼자 가서 링겔맞고 오기도 했다.

거의 5일을 학원에 못 갔는데 회복이 되어 복귀했을 때도 내 정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머리가 띵했었다.

이 때가 2009년, 신종플루가 막 유행하기 직전이었는데 아마도 내가 앓던 병이 신종플루가 맞지 않았을까 싶다.

집에도 알리지 않고,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뜨거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어느새 교실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쌀쌀한 공기로 다가왔다.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지만 모의고사를 보면 기대만큼 점수는 안나왔다.

학원 수업덕분에 언어영역은 꽤나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고, 사회 또한 기본적인 감에 공부까지 더해지니 이전의 수능들과는 다르게 기복이 없으리라 예상됬다.

반면에 영어는 정말 문제였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혹은 그 위 세대의 기출문제를 풀어봐도 나에게 외국어영역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수능 응시생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던 세대였고, 영어조기교육이 어마어마하던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였다.

정말 몇 년 차이 안나지만 우리는 끼인세대였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영어단어를 읽게된 친구들도 많았고, 그나마 그 때 포기해버린 친구들은 영어를 아예 내려놓기도 했었다.

그나마 난 어릴 때 억지로라도 다녔던 영어학원이 도움이 되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는 영어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 때와는 다른 수준의 단어들, 훨씬 어려워진 문법 그리고 듣기까지.

이건 단기간의 노력으로는 힘들었다.

수학 또한 이과에서 옮기자마자 받은 고득점은 공백기가 길었던 만큼 신기루처럼 없어졌고, 나에게 어떠한 메리트도 없는 과목이 되었다.


이 땐 참 막막했다.

5개월이라는 기간도 기간이지만 노력이 군대 2년 갔다온 동안 식어버린 머리를 이기기는 힘든 듯 해 보였기 때문이다.

수능을 한 달 반 정도 남긴 어느 날, 서울살이, 고시원살이, 수험생살이에 지친 친구는 여주로 내려가겠노라고 선언했다.

나도 이 때 흔들리지 않았던건 아니었다.

친구를 이해했다.

재수 때, 나도 그랬기에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10월 초에 집으로 내려왔었다.

사실 모든 n수생들이 흔들릴 시기가 이 때쯤이다.

3월부터 9월까지는 다들 열심히 달린다.

옆을 봐도 앞을 봐도 누구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집중한다.

하지만 10월이 되면 하나 둘 씩 마음이 흔들린다.

이유는 제각각이다.

과외같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더 이상 가망이 없어보여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수업이 무의미할 것 같아 자율학습 시간을 늘리고도 싶고...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은 서울사는 애들보다 더더욱 흔들린다.

아무래도 집에서 다니는 것보다 배 이상은 지칠테니까.


그런데 나는 마음을 한 번 더 잡았다.

재수시절 집으로 내려오고, 허비했던 그 한 달을 또 재현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시험때까지 루틴을 지켜갔던 친구들이 시험을 잘보는 경우가 많았다.

난방을 잘 안해줬던 고시원 방은 아침만 되면 추워죽을 것 같았지만 변함없이 알람소리에 일어나 학원으로 향했다.

그 후로 수능을 1주일가량 앞둔 학원 종강까지 서울에서 버텼다.


종강 날, 정들었던 같은 반 친구, 동생들과 찐하게 인사나누고, 나를 유독 챙기셨던 담임선생님께도 잘 치르고 돌아오겠노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월드컵에 가기전 출정식을 치르는 선수들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고향집으로 내려와 일주일간 수능날과 같은 루틴에 맞춰 생활했다.

신종플루가 두려워 사람들 모이는 도서관은 못 갔지만 집에서 무난하게 마무리했다.


드디어 내 인생 마지막 수능 날이 찾아왔다.

(이번 수능에서 망하든 잘보든 이걸로 종결짓겠다는 의지는 확고했으니까.)

학교는 매번 바뀌었지만 익숙한 풍경만 네 번째 봐서인지 큰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교복입고 교실로 들어오는 고3 동생들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그래, 형도 다 그랬어 임마 자식들아~'


언어영역이 시작됬다.

1교시만큼은 자신있었다.

이걸로 수리, 외국어에서 까먹을 점수를 벌어놔야 했다.

난이도가 쉬운듯 문제도 술술 풀렸다.

설레발치면 안되는데 뭔가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시험 종료까지 마킹하면 딱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약 3분정도 남은시간 마킹을 시작했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하나씩 검게 칠하고 있었다.

47, 48, 49번까지 무사히 마킹하고 남은 50번을 보는데 50번이 비어있다.


어?


어??


뭐지???


지금 상황은 당황하는 것도 사치라는 듯 감독 선생님께서 "곧 걷을 테니 마지막으로 확인해보라"고 하셨다.

시계를 보니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빈 A4용지 같던 머릿 속에 짧지만 강한 문장 하나가 등장했다.

'망했다.'


그제서야 내가 답안지를 밀려썼음을 알았다.

이미 나간 멘탈에 답안지를 다시 달래서 1분만 더 주십사하고, 사정하는건 무리였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선 종이 울렸고, 책상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1교시가 끝나고 왜 남은 영역들을 포기하고, 고사장을 빠져 나가는지 알 것 같았다.

동요하지 않아야 하는데 절망적인 감정은 그나마 남아있던 수학공식, 영어단어, 온 갖 종류의 지도를 앗아갔다.


뭐에 홀린듯 아무의미없던 아랍어 시험까지 마치고, 교실을 나왔다.



모두 꿈인 것 같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내 마지막 수능이 끝났다.

모두 꿈인 것 같았다.

딱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한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을까.

절대적인 희망에서 극단적인 절망으로.

헛되더라도 기대조차 되지 않는 시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아무리 못 본 시험이라도 찍은게 맞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있었으니까.


당시의 등급도 지원했던 학교들도 기억이 희미하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나 뻔했기에 선명히 기억난다.


난 다시 선택의 기로 앞에 섰다.

이젠 수능에 대한 아쉬움은 1도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꽤나 극단적일 수 밖에 없다.

대학을 가지 않거나, 부딪혀보는 심정으로 해외대학을 노리거나, 지원가능한 전문대나 산업대를 써보거나, 지긋지긋했던 정말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 학교로 돌아가거나.

하나라도 쉽지 않았다.


정말 깊게 고민한 끝에, 그에 걸맞지 않은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를 골랐다.


'그래, 돌아가자.'


자퇴했던 전 학교에 재입학 신청서를 내기로 했다.


신청을 받는 기간까지 몇 달의 여유가 생겨 세 달간 필리핀을 다녀온 후 난 고학번인 1학년이 되어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온 학교는 생각보다 무던했다.

무너질 것 같은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당장 죽을 것 같던 내 심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온 학교를 벌써 몇 년째 다니는 건지...>



그렇게 적응을 하고, 몇 년 뒤 대외활동을 통해 우연히 우리학교 후배를 만났다.

활동할 땐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되어 연락하며 가끔 보는 사이가 됬고,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본인도 학교를 관두고 재수를 할지, 편입에 도전할지 고민중인데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가 너무 두렵다고 했다.

그리곤 "오빠는 괜찮았어요? 난 진짜 죽고싶을 것 같은데"라고 했다.


그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스무살의 나와 온갖 일 다 겪고 돌아온 스물 다섯의 나는 다르다는 것.

누가 쳐다볼까 두려워 혼자 밥도 못 먹던 스무살의 나는 바글바글하는 학생식당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스물 다섯의 내가 되었고, 낯선사람 만나면 제대로 말도 못했던 스무살의 나는 꽉찬 대형 강의실에서 발표하기를 즐기는 스물 여섯의 내가 되었다.

학교는 사실 그대로였다.

오직 바뀐 건 나 뿐.

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와 돌아왔을 때의 마음가짐만 바뀐 것이다.


나의 수능을 정리해보니 참 길기도 했고, 별의 별 일 다 있었다.

사실 수능보다도 뒤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이 더 길고 지루하고, 더 별의 별 일이었지만 말이다.

지나고 보면 그 별 일들이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느껴진다.

어찌됬든 다 지나가니까.


이번에 수능을 본 수험생이라면 그 결과로 인해 여태껏 느껴본적 없는 고통을 느낄 수도 있다.

이건 최악이다 싶을 정도로 느껴지더라도 너무 깊게 빠져들지 않았으면 한다.

이건 수험생들에게도 나를 포함한 어른들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다 지나간다.

그리고 어떤 결과를 받아들더라도 본인의 자존감을 바닥에 던져놓고, 내팽겨치지는 말아야 한다.

이것 역시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어찌됬건 다들 수고 많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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