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댕굴 Dec 12. 2020

베를린에서 전범기를 마주하다.



유럽을 여행하며 마음에 들었던 도시는 베를린이었다. 이상하게도 유럽으로 떠나기 전 독일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만났으나 독일 친구들과는 번번하게 그 찡하고 통하는 무언가가 없어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고 특유의 이미지가 머리에 박혀 있어 꼭 가고 싶은 나라 리스트에도 독일은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독일에 생각보다 꽤 오래 머물게 된 것은 사촌언니를 만나러 소도시에 갔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힙스터의 도시'라는 말이 어울리는 도시다. 운 좋게 겨울이었음에도 날씨까지 좋아서 길거리를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있었다. 어딜가나 보이는 멋진 그래피티, 개성 강한 옷차림의 사람들, 언더그라운드 아트 갤러리들을 볼 때마다 자꾸 웃음이 나오고 사진을 찍게 되었다. 엄청난 규모의 도시에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베를린의 밤은 또 어떤가. 비엔나에서 10시간동안 버스를 타고 달려 베를린에 처음 내렸을 때, 허기진 배를 이끌고 파이브 가이즈에서 우걱거리며 햄버거를 입에 쑤셔 넣고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호스텔로 향하던 날 밤, 길거리의 수많은 노숙자로 인해 겁을 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한참을 헤매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걸어가던 그 때, 줄 지어 서 있는 사람들과 쿵쿵 울리는 비트 소리 그리고 조금씩 새어나오는 화려한 불빛을 보고 생각했었다. 아, 나는 베를린이랑 잘 맞을 것 같다고.







베를린은 크다. 유럽을 여행하며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규모에 놀라곤 했는데 베를린은 달랐다. 서울보다 크다는 도시는 지역마다 참으로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걸쳐 도착한 베를린은 서울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익숙하면서도 거리 곳곳은 유럽 특유의 여유로움과 고풍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보기 드문 겨울의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정원에서 산책을 할 때,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베를린은 할 것도 굉장히 많은 도시이다. 수많은 박물관과 역사 관련 장소를 방문하고, 쇼핑을 하다보면 일주일은 금방 흐른다. 부끄럽게도 나는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책과 영화를 통해 접한 것이 전부이기에 구체적으로 많은 것을 알지 못했고 이는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타서까지 조금 더 공부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로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는 미술에 대한 지식으로 어느 정도 커버 가능했던 나의 짧은 역사적 소견이 베를린에서는 창피하게도 낱낱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세계 대전과 관련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베를린 장벽 근처의 박물관에서 그 흐름을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어 짧은 시간 안에 배울 수 있었기 망정이지 이게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베를린의 10%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만큼 베를린은 역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도시이다.







하루 날을 잡아 베를린 장벽, 유대인 박물관, 체크포인트 찰리 등을 모두 방문하였다. 전쟁의 아픔과 인간의 잔혹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하루였다. 그리고 독일이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며 자연스럽게 일본의 태도에 대해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저녁 일정인 쇼핑을 시작했다. 기대하던 Urban Outfitters에 드디어 방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으로 하나씩 구경을 하던 나를 얼굴 찌푸리게 만든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내 주변 서양 친구들에게 익히 들었듯, 최근 서양에서는 오리엔탈 풍의 옷이 힙스터의 상징이라고 한다. 종종 옷 가게에서 요상한 말이 안 되는 한자 (아마 영어권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영어 옷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라 생각한다), 용 혹은 호랑이 그림 등으로 도배된 옷들을 볼 수 있는데, 아마 당시 Urban Outfitters도 이러한 유행에 편승하여 이를 테마로 새로운 컬렉션을 내놓은 듯 했다.


문제는 그 티셔츠들에 전범기가 아주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서양인들의 전범기에 대한 무지는 이미 많이 겪었기에 (일본에서 교환학생을 하며 하라주쿠에서 전범기 옷을 판매하는 가게와, 그걸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 실상은 알고 있었으나, 이를 옷으로 만들어 파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설상가상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가득한, 독일의 모습을 하루 종일 보고 왔기에 이 발견은 나를 더욱 분노하게 하였다. Urban Outfitters가 독일 회사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그냥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모순적이라고 느껴졌다. 역사를 잊지말자는 도시에서 아시아인으로서 내가 마주치는 이 불쾌함은 어디에 표현을 해야할까? '무지'라고 표현을 하기에는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 그리고 불쾌한 경험이 될 사건이었다.


이 목격으로 인해 나는 그 어떤 이중성과 씁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암스테르담에서 전범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파는 옷 가게를 또 한 번 목격함으로서 더욱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당시 암스테르담의 가게는 굉장히 소규모의 쇼핑몰이었기에 혹시 피드백을 받아주지 않을까 싶어 인스타그램 DM으로 상황을 설명했고, 미안하다고, 잘 몰랐다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고 다른 후속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으며, 인스타그램 판매 피드에서도 그 티셔츠는 끝내 내려가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유럽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전범기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우리는 언제까지 그 '무지'라는 말에 포장된 칼날에 상처받고 불쾌해야 하는건지. 서러워지는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코로나에서 살아남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