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인싸

by 유유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고 자신감을 얻었다니 말이다. 엄청난 인지부조화가 일어난 것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할까. 자신감을 얻었으면 된 것 아니겠는가.


새치가 허옇게 올라오고 새벽이면 눈이 떠지는 노화현상들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는 나(39세, 여아)에게 초딩들은 우습게 볼 존재는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우리 조카(8세 여아)로 말할 것 같으면 서울시의 한 구에서 주최하는 줄넘기 대회에서 무려 1등을 한 체육 우등생이다. 공부도 잘하고 반장까지 거머쥔 인싸 중에 인싸 아이. 그 아이 앞에서 어찌 당당히 어른이라고 으스댈 수 있단 말인지...

그리고 방금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저 남자아이들(9세 남아) 또한 그러하다. 일단은 남자아이라는 점에서 신체적으로 나보다 우월한 DNA를 탑재하였을 거라 예상되고 아무리 날씨가 좀 풀렸다 해도 겨울날에 달랑 트레이닝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는 점에서 나와는 어나더 레벨의 인간이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가 있다.


처음에는 조카와 튼튼이(4세 남아)와 남자아이들이 친하게 잘 놀게 하려는 요량이었다. 여럿이 놀면 놀거리가 풍성해지고 그럼 나는 쓰윽 빠질 수 있게 되고, 그럼 구석에서 핸드폰이나 두드리다가 얘들아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하고 데려가면 아이들은 지쳐서 얌전해질 것이고... 일찍 잠들게 되고... 나는 다시 핸드폰을 두드리고...


헌데 놀다 보니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함께 동화되어 놀기 시작한 데에 첫 번째는 자신감 증진이었다. 저 날쌔고 폭발적인 에너지의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잘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여기 놀이터에서.

첫 번째는 철봉 거꾸로 매달리기였다. 나이 든 사람들이 혈액순환을 위해 즐겨하는 신체 활동인 거꾸로 역행하는 자세를 나도 즐겨하는 편이다. 그래서 가끔 육아 중에 철봉을 만나게 되면 한 번씩 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려 만세하고 매달리곤 한다. 물론 목적은 혈액순환과 관절공간 확보?를 위함이다. 그날도 건강을 위해 한번 매달렸을 뿐인데 아이들이 우와하고 달겨들었다. 이 정도쯤은 아이들도 쉽게 하리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꾸준히 요가를 한 덕분인가 하고 흐뭇해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힘입어 요가의 머리서기 자세를 선보였더니 아이들은 다시 우와하고 탄성을 지르고는 너도나도 거꾸로 서려다 이리저리 구르고 난리가 났다. 너 그럼 이거 할 수 있어? 가 여기저기서 난발하며 각자의 장기를 뽐내기 시작했고 나는 되도 않는 옆돌기를 연습해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점점 몸에 열이 오르고 그러면서 두 번째 이벤트가 벌어졌다. 못할 거라 예상했던 일을 성공시키고 만 것.


남자아이 중 한 명이 뻥 차올린 축구공이 나무 위에 걸리고 말았다. 꽤나 우직하고 높이 뻗어있어,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고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이자 주변의 물건들을 나무 위로 던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는 축구공 근처에도 못 가 떨어지기 일쑤였고. 형제가 가져온 스펀지 같은 재질의 야구공은 축구공에 미동조차 주지 못했다.

사실 나는 저 축구공이 나무에 매달린 채 집으로 헤어지는 결론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쌍둥이 형제 중 한 명이 나무를 자른다는 둥 부셔야 한다는 둥 나무 훼손시키는 방법을 이야기하길래 축구공을 새로 사는 게 났다고 나무가 더 소중하다고 말 한번 잘못했다가 내 축구공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아냐는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축구공을 정말 내려보아야겠다고 마음먹어버렸다.

나뭇가지와 스펀지야구공을 반복해서 던지기는 했지만 사 실 그 와중에도 경비 아저씨나 똑똑하고 건장한 누군가가 사다리나 긴 장대 따위를 들고 나타나주길 기다렸다. 처음에는 서로가 던지겠다고 나뭇가지와 야구공을 낚아채려 했는데 다들 지쳐갈 때쯤 쌍둥이 형제 중 한 명이 나를 밀어주기 시작했다.

"외숙모가 제일 잘 맞히고 있어. 외숙모가 내릴 수 있을 거 같으니까 외숙모한테 줘봐!"

내 조카도 아닌 그 아이는 조카를 따라 나를 외숙모라 불렀고 나의 가능성을 보고 믿고 맡기려 했다. 그 말에 더욱 책임감이 생겨버린 나는 진심으로 공을 내려야겠다는 적극성을 장착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방법을 고심했다. 챙겨 온 가방 주변에 먹고 버린 간식거리 쓰레기가 보였고 비닐봉지 안에 바나나 껍질들과 쓰레기들을 주섬주섬 주워 넣었다. 나뭇가지보다는 가볍지만 축구공을 맞혔을 때 스펀지공보다는 타격감이 있을 법한 도구를 만들어봤다. 그리고 그것을 던지자 아이들이 다시 우와하고 눈을 반짝였다. 모두가 외숙모 그게 뭐냐고 그거면 축구공을 내릴 수 있겠다고 좋아했고, 나는 리더로 추켜세워주는 그 분위기에 점점 취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느껴본 감정 같기도 했다. 다수가 나를 좋아해 주고 믿고 따르는 느낌. 바로 인싸감이랄까.


그리고 여기까지에서도 사실 공을 내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은 못했었다. 그러기에 축구공이 바나나껍질 봉지에 맞고 떨어지는 그 순간에 정말 로또라도 맞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부둥켜안고 만세를 불렀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높이 걸린 축구공을 내가 만든 도구로 맞히기까지 하고 떨어뜨리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학생시절 단 한 번도 뜀틀을 넘어본 적 없고 운동회 달리기에서 팔목 도장을 단 한 번도 찍혀본 적 없는 내가. 해낸 것이다. 못할 줄 알았는데. 못할 줄 알았어. 진짜.


그날의 기억을 무슨 성공스토리 마냥 떠들어 대면서도 약간 멋쩍기도 하다. 누군가는 주책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한낮 초딩들에게서 자신감을 얻고 인싸의 경험을 했다는 무슨 오글거리는 이야기를 하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나는 아마도 그 시기쯤 성장을 멈춰버린 아이로, 마흔을 앞두고 있는 어른인 것을. 인싸를 동경하며 무리를 이끌고 불가능을 해내는 경험을 아마도 꿈꿔왔으니 이런 글을 쓰고 있으리라. 하지만 무리의 중심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함은 인간이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끄적여 본다. 저 높이 내걸린 축구공 같은 불가능을 하나씩 떨어뜨리다 보면 어느새 불쑥 자랄 것만 같아서. 주책이래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읽지 못하는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