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삶, 만드는 삶 3
고전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수천 년간 계속 읽히고 매 시대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책도 있지만 고작 몇 년 만에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책도 많다. 가끔 중·고교 필독서를 살펴보곤 하는데, 내가 그 나이 때 읽었던 고전들이 아직도 그대로인 경우도 있다. 책은 그것이 쓰이고 만들어진 시대의 초상을 담으니 그 안에 당연히 한계도 담긴다. 지금의 잣대로 당시 사상이나 성취를 평가한다면 그건 공정하지 않다.
그래도 필독서에 부여되는 권위를 생각하면 책을 읽을 때 긴장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얼마 전, 필요한 일이 있어서 ‘한국단편문학전집’의 단편 몇 편을 읽게 되었다. 중학교 무렵에 읽었던 책들이니 30년도 전에 읽었던 것들이다. 좀 충격을 받았다. 나도향의 단편 「물레방아」에서 주인공 방원이 아내에게 잔혹할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는 대목인데, 이런 부분을 읽은 사람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방원이가 계집을 치는 것은 그것이 주먹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농담이다. 그는 주먹이나 발길이 계집의 몸에 닿을 때 거기에 얻어맞는 계집의 살이 아픈 것보다 더 찌르르하게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아픔을 방원은 깨닫는 것이다. 홧김에 계집을 치는 것이 실상은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이빨로 물어뜯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때리는 그에게는 몹시 애처로움이 있고 불쌍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화풀이를 받아 주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계집밖에는 없었다. 제일 만만하다는 것보다도 가장 마음 놓고 화풀이를 할 수 있음이다. 싸움한 뒤, 하루가 못되어 두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고 서로 꼭 끼고 잘 때에는 그렇게 고맙고 그렇게 감격이 일어나는 위안이 또다시 없음이다. 계집을 치고 화풀이를 하고 난 뒤에 다시 가슴을 에는 듯한 후회와 더 뜨거운 포옹으로 위로를 받을 그때에는 두 사람 아니라 방원에게는 그만큼 힘 있고 뜨거운 믿음이 또다시 없는 까닭이다.”
여자를 때리는 것이 농담이고, 사랑의 표현이며, 하루가 못 되어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화해하는 이 과정, 어디서 많이 보고들은 이야기 아닌가. 한국단편문학전집을 내가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무렵이었다. 오빠가 며칠 전 학교에서 사온 책이었는데, 학교에 온 외판원이 고등학생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했단다. 세로 조판의 하드커버 ‘한국단편문학전집’ 10권이었다. 1980년대 중반 가로 조판으로 책을 바꾸면서 재고를 정리하려던 것이었으리라.
세로로 쓰인 책이라 처음에는 읽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자꾸 같은 줄을 읽게 돼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힘들었다. 읽다가 재미가 없으면 다른 소설로 넘어가곤 했는데, 이때 읽은 작품들이 「물레방아」를 비롯해서 「뽕」, 「감자」, 「백치 아다다」, 「벙어리 삼룡이」 같은 작품이었다.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녀가 어른들의 음침한 세계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이상한 감정이 남았다.
이들은 연민이 필요한 사람인데, 이 작품들에서는 모두 비극의 원흉인가. 거의 모든 소설이 그랬다. 「감자」(김동인)의 ‘복녀’라는 여자 주인공은 양반집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집안이 몰락하자 몇 푼의 돈에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왔다. 늙고 무능한 남편은 있는 돈을 다 털어 먹고 빈민굴에 나앉게 되고 그나마 젊은 복녀가 날품을 팔아 먹고산다. 그러던 어느 날, 복녀는 일하는 곳의 관리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그 후 복녀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나도향의 「뽕」도 내용이 거의 흡사하다. 주인공 여자 안협집은 참외 한 개 때문에 어릴 때 겁탈을 당한 후 돈만 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몸을 팔며 살아간다. 노름꾼 남편은 알고도 모른 척한다. 「물레방아」에서는 남의 집 살이를 하는 방원이라는 남자의 아내가 그렇다. 그 아내는 이름조차 없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집이라고만 불리는데, 아들만 낳아 주면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집 주인 남자의 꾐에 넘어가 주인과 물레방아에서 밀회를 나눈다.
결국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비극적 파국에 이르지만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모두 여성 개인의 부도덕한 정조 관념 때문이다. 당시에는 어려서 그냥 소설에 나오는 남자들은 왜 다 이런가, 가난한 남자들은 여자들을 때리고 돈 있는 남자들은 여자들을 강간하는 걸까 하고만 생각했다. 소설 속 무능한 남자들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착하다고 동정 받는 거 같은데, 여자들은 왜 모든 사태를 만드는 원흉이 되는 걸까, 의아하기만 했다.
지금 소설을 다시 보니 모든 게 선명해진다. 아무리 시대 상황이 엄혹했다 하더라도 여성과 남성에 대한 인식은 달랐던 거다. 그들 모두 계급 사회와 자본주의라는 사회에서 온갖 모순을 시달리지만 남성은 구조의 희생양으로 불쌍하고 가여운 존재로 넘치는 이해와 연민을 받고, 여성은 사회와 가부장제이라는 이중 착취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도덕적으로 문란한 여자로 비난 받고,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게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이 책들이 내게 영향을 주었을까? 인과관계를 밝히기는 어렵겠지만 여성이 되어 가던 와중에 이런 소설들을 읽었다는 건 비극이었다. 내가 여자인 것이 싫어졌기 때문이다. 짧은 머리에 늘 바지만 입고 다녔던 내게 어른들은 ‘여자가 여자 같아야지’ 하며 여성스러움을 주문했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소설 속에 그려진 여성스러움은 부도덕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여자들의 표시 같았다.
나의 욕망이나 여성스러움을 드러내면 나도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만 같았다. 내게 여성스러울 것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여성을 드러내면 돌아올 비난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임이 그토록 겁났던 것이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강간이나 성추행을 당한 여성이 밤늦게 술 취한 상태였다는 이유로, 옷차림이 조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리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 흔하다.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이 되는 자연스럽고 멋진 경험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한 것이 ‘한국단편문학전집’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나는 아직도 이 소설들이 중·고등학교 필독서일까 봐 겁이 난다. 아들을 둘이나 낳아 키우다 보니 아들의 사춘기는 여성이었던 내가 겪은 사춘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들의 사춘기는 남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망설임이나 부끄러움 같은 게 없었다. 소녀들이 이런 당당함을 갖는 건 어려운 일일까?
자각하면 더 많이 보인다. 지난 해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를 볼 때였다. 이 영화는 여러 모로 훌륭한 영화였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졸이는 나 자신을 깨닫고 약간 허탈함을 느꼈다. 이 영화의 여 주인공은 FBI 요원으로 멕시코 범죄 집단과 연결된 사건을 CIA와 함께 수사 중이다. 나는 주인공 케이트가 함께 일할 사람으로 CIA 남성 요원들에게 소개되었을 때, 여자를 우리 작전에 넣다니 우릴 무시하는 거냐는 반응이 나올까 두려웠고, 작전이 벌어지는 긴박한 순간에 실수를 저지르거나 감정적인 행동을 해서 다른 남자들을 위험에 빠뜨릴까 봐 긴장했다.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는 대부분 그랬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런 장면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놀랐다. 나는 소녀들을 위한 필독서 목록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서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여성이 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려 주는 그런 책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면 훨씬 더 당당한 여성들이 많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