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기 황홀한 비극이 있다. 역시 삶이란 이름의 무대에 올려진 것이다. 희극에는 결코 황홀함이 없다. 희극이 허용하는 감정 이동은 페이소스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비극에는 오르가즘이 있다. 비극만이 절정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절정이 없는 비극은 눈물의 배설에 도움을 줄 뿐 황홀함의 경지로 우리를 데려다주지 않는다. 천박한 비극이라면 우리는 이미 신물 나게 보아왔고 겪어왔다. 그것들은 때로 희극적이기조차 해서 누구의 눈물도 얻지 못하는 수가 많다.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인 비극 말이다…
-강민주의 노트에서
독서모임에서 양귀자 작가의 ‘모순’을 추천받았다. 양귀자라면, ‘원미동 사람들’의 양귀자? 나는 바로 메모를 했다. 교과서에서 짧은 단락만을 읽었는데 장편소설 전체를 읽어본 적 없다. ‘모순’을 사려고 알라딘에 들어갔다가 그의 다른 소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김영하 작가의 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생각났다. 어쩌면 나는 금지나 파괴 같은 자극적인 단어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두 책 다 90년대 출간된 책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책. 일명 ‘나소망’.
‘나소망’의 제목은 우선 시의 구절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도 프랑수아즈 사강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주인공 강민주는 강인한 사람인데 그래서 세상 모든 연약한 감정들에 시니컬하다. 그는 상담소에서 일하면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전화를 숱하게 받는다. 그는 상담내용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지켜나가야 할 태도를 견지한다.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강한 폭력으로 굴복시키겠다는 태도다. 강민주는 어떤 실험을 시작한다. 당대 최고의 스타 백승하를 납치하기로 하면서 이야기는 불이 붙는다.
강민주 옆에는 여러 남성들이 있다. 심복인 황남기, 소개받은 김인수, 그리고 연예인 백승하까지. 황남기는 충직하고 김인수는 끈질기고 백승하는 다정하다. 강민주의 기괴한 실험은 주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방해받는다.
소설의 전반부는 강민주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그의 불도저(혹은 개차반) 같은 성격은 단번에 공감하기 어렵다. 그래서 상당 부분을 그에게 이입시키는데 할애한다. 과정에서 지루함을 느끼는 찰나…(그러나 이미 스며들고 있다) 강민주가 백승하를 납치하는 데 성공하고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면서 재밌어진다.
이 소설이 90년대 페미니스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제까지 이토록 강하고 못된(ㅋㅋ) 여자 주인공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작가는 소설이 성대결을 위해 쓴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사진이다.’
주인공으로 강민주 정도는 필요했다고도 말했다.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물살을 거스르며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는 여자. 그런 주인공이 필요했다.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에서는, 소설이므로, 강민주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방에서 어딘은 다양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했었지. 영화감독 박찬욱은, 이렇게 새롭고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들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이때까지 여자 캐릭터들 자체가 없었을 뿐이라고 말했고. 여자 이야기가 전 장르에서 나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 블루오션이다.
‘나소망’은 분명하게 당황스러운 지점과 통쾌한 지점이 교차하는 소설이다. 다 읽고 나면 먹먹한 슬픔이 남는다. 이런 소설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는 논외로 해도 무척 재밌었다. ‘재밌었다’로 끝나는 감상이 싫은데도 재밌었다고 마침표 찍고 싶은데 어떡하지? 90년대에는 강민주가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