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들어가기도 전, 샤워실 텃세부터 견뎌라.
동네 체육센터에서 4개월째 수영 강습을 받고 있다. 내가 수영을 시작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종종 물어보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수영장 텃세.
여기저기 수영장마다 텃세가 심하다고 소문이 자자한가 보다. 나도 그래서 처음에는 오전 9시 수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체육센터에서 예전부터 몇 차례 그런 불쾌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가 다닐 때 앞자리 맡아두기, 아쿠아로빅할때 자기 자리라고 텃세 부리기 등등. 웬만하면 아침 6,7시나 밤 8,9시에 하고 싶었지만 아이가 있으니 아이 학교 시간에 맞추는 게 나에겐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탈의실에서, 샤워실에서, 수영장에서 별별 사람들이 다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랑 갈등이 생기거나 하는 일은 없어서 적당히 눈치 보고 적당히 무시하면서 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수영장에 도착했다. 수영을 하기 전에 샤워를 하고 들어가는데 일찍 가서 그런지 샤워실이 한산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이미 많아서 그냥 빈 샤워기를 찾아서 자리를 잡았지만 그날따라 빈자리가 더 많아서 그중에 안쪽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어떤 60대 초반 아줌마가 샤워실로 들어와서 내 쪽으로 왔다가 내가 씻고 있는 걸 보고 건너편 자리로 가면서 주변에 씻고 있는 다른 아줌마들(60~70대 사이 4~5명)에게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유~ 쪼끔 늦게 왔더니 내 자릴 뺏겼네."
샤워기에 자리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니까. 신경 안 쓰고 나는 열심히 내 몸을 씻고 수영복을 착용하고 수영장에 들어갔다.
다음 날, 그날도 준비가 빨리 돼서 전날처럼 조금 일찍 수영장에 도착했고, 나는 전날 씻었던 자리에 가서 샤워를 시작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사람마다 선호하는 자리가 따로 있는 거. 나는 조금 안쪽 구석진 자리가 좋아서 전날도 그날도 비어있던 그 자리를 선택했다.
머리를 감고 있는데 어제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 아줌마가 또 내 앞까지 왔다가 어제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요즘 준비가 조금 늦어졌더니 자꾸 내 자리에서 누가 씻네~"
저한테 말씀하시는 건가요? 머리에 샴푸 거품이 잔뜩 있어서 눈을 제대로 못 뜨다가 너무 큰 목소리에 거품을 닦아내고 소리 나는 쪽을 보니까 그 아줌마가 내 건너편 샤워기 아래에서 샤워기 물을 맞으면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야. 무슨 자기가 여기 샤워실에 전세 냈어? 순간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나는 당신 말이 안 들려, 나는 당신이 안 보여.'기운을 온몸으로 발산하며 여유 있고 우아하게 구석구석 꼼꼼하게 비누칠을 하고 몸을 닦았다.
그분은 샤워를 하면서도 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 옆에 있던 아줌마가 갑자기 내 앞에 있는 아줌마에게 내 자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 맨날 오는 갸 오늘 안 왔어?"
"어~ 왔는데 자리 뺏겨서 즈짝으로 갔어."
그 자리 뺏긴 아줌마가 이때다 싶었는지 또 큰소리로 말했다.
"아유. 저 여기 있어요."
"왜 그기 갔어?"
"아니~ 지난번부터 평소보다 쪼끔 늦었는데 내 자리를 홀랑 뺏겨갖고~"
"다 자기가 하는 자리가 있는데 왜 남의 자리를 뺏고 그른대?"
아.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었구나. 지금 자기들끼리 나 들으라고 연극하는 거였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뭐라 하지는 않고 그냥 나 들으라고 내 주변에서 자기들끼리 주거나 받거나 대사 치는 거였다. 수영장에도 있구나. 일진 놀이하는 사람들.
잠시 고민.
"어디 샤워실에 전세 냈나, 매매라도 하셨나." 혼잣말이라도 크게 해?
이 구역의 ㅁㅣㅊㅣㄴㄴㅕㄴ처럼 눈 뒤집어까면서 말대꾸 해볼까 잠시 생각했다가 말았다.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무시하자. 그러거나 말거나 귀 안 들리는 사람처럼 평소보다 더 천천히 씻었다. 수영장의 일진 언니들은 그 후로도 나를 힐끔거리면서 몇 마디를 더 얹었지만 내 귀는 이미 닫혀있었다.
아쉽게도 그 이후로는 아이가 방학을 해서 일찍 수영장을 갈 수가 없어 그 자리는 다시 그 아줌마가 차지했을 것이고 나는 되는대로 빈자리에서 씻고 들어갔고 그 이른 시간에 오는 언니들을 샤워실에서 마주칠 일도 없었다.
오늘 오랜만에 조금 일찍 서둘렀더니 샤워실에 그쪽 자리가 있었다. 그때 그 샤워기는 그 자리에 전세 내신 언니가 이미 씻고 있었고, 그날 연기하느라 고생하신 다른 일진 언니들도 자기가 전세 낸 자리에서 씻고 있었다.
어떤 20대 후반? 30대 초반 여자가 들어와 한자리를 차지하고 샤워를 막 시작하려는데 이어서 다른 아줌마가 오더니 거기가 자기 자리라는 거다. 30대 초반 여자가 자리가 비어있었다고 했더니 그 아줌마가 자기가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했다.(그런데 그 자리에는 목욕 바구니도 없었다.) 30대 초반 여자가 자기가 왔을 땐 아무것도 없었고, 자리 맡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 아줌마는 자리를 맡은 게 아니라 원래 자기가 하고 있던 자리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나도 직전에 금방 들어온 거라 그 아줌마가 원래 씻고 있다가 화장실에 다녀왔는지의 사실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나중에 그녀들의 대화에서 그 아줌마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게되었다.) 30대 초반 여자는 상대하기 싫었는지 대충 씻고 나가버렸다. 그 여자가 나가고 난 뒤, 그 아줌마가 옆자리 아줌마들에게 성을 냈다.
"내 자리 맡아줬어야지!"
"자리 맡아주면 뭐라고 하는데 어떻게 맡아~"
"잠깐 화장실 갔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요즘 자리 맡으면 엄청 뭐라고 해~"
"젊은 것들이 난리야. 아주 그냥.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우리는 애초에 절대 남의 자리 안 뺏지. 우리는 옛~~~날부터 계속 이 자리에서 씻었잖아."
졸지에 근처에서 샤워하고 있던, 얼마전에 일진언니들의 샤워자리를 뺏어갔던 싸가지 없는 젊은 것(60~80대들 사이에서 나는 엄청 젊은 44살이다. 수영장에서 어려서 좋겠다는 말 많이 들음)인 나는 오늘도 또 귀 안 들리는 마냥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도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의 마음가짐으로 샤워를 하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한 시간 열심히 수영하고 나오는 길에 체육센터 사무실에 들렀다. 실장님께 이야기했다.
"샤워실에서 아주머니들이 자리 맡아요. 자리 맡아놓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면 화장실 간 거라고 해요. 자리 맡으면 안 된다고 얘기하면 젊은 것들이 싸가지 없다고 하세요. 지난번에도 자기자리에서 샤워했다고 눈치주고 텃세부렸고요."
고자질쟁이가 되어본다.
"아휴. 아까도 어떤 분이 자리 맡는 것 때문에 컴플레인 하셨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번을 말씀드려도 정말 막무가내인 분들 많아요. 수영 강습 없는데 샤워만 하러 오기도 하고, 환불해놓고 그냥 다니기도 하고. 그래서 저희가 뭐라고 하면 도리어 저희한테도 큰소리치세요."
체육센터에서도 고충이 많다고 한다.
마피아가 이탈리아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수영장에도 마피아가 있다. 수피아라고 불러야 할 듯. 일진 언니들 같기도 하고, 뒷골목 깡패 같기도 하고. 떼거리로 뭉쳐 다니면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구니까 그런 몇명 때문에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을 욕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념 없는 건 사실 나이랑은 상관이 없는 거지만, 요즘 특히나 노인 혐오가 심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런 사람들과는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게 좋다. 어차피 논리적으로 싸움이 되질 않으니까.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지. 저런 어른이 되지는 말아야지 하고 반면교사 삼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