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리뷰

이 디테일까진 몰랐을겁니다

by 김재상

이번 글에선 알베르 카뮈 - 「이방인」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스토리 요약은 다른 좋은 영상 자료가 이미 많다고 생각해서 다루지 않겠다. 신 자료를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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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뫼르소처럼 사는 게 맞는가?

이방인을 보면서 "나랑 안 맞는다."라고 느끼거나 책 내용이 해설에서 설명하는 카뮈의 철학이랑 조금 다른 것 같다고 생각이 들 수 있다. 뫼르소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흔한 답답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관 앞에서 밀크커피를 즐기거나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보지 않는 장면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인간은 다양하지만, 이후의 뫼르소의 행동은 더 깊은 문제를 드러낸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장례식 직후 충동적으로 마리와 해변 데이트를 즐긴다. 더욱이 그는 마리에게 냉담하게 대하고, 사랑과 결혼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여기며, 레몽이라는 범죄자를 돕는다. 현대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뫼르소의 이러한 행동들은 분명 여러 측면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자,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뫼르소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의 행동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설명하려 든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런 세계와는 동떨어진 인물이다. 그는 사회의 관습이나 도덕률에 무관심하다. 우리가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그의 행동들—어머니 장례식 후의 해수욕, 살인에 대한 무감각함, 심지어 처형 직전의 분노까지—은 오히려 그가 진정성 있게 살아가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레몽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뫼르소는 그저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그에게 미래란 없고, 과거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사회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한 무관심은 인간관계의 기본 예의를 어긴 것처럼 보인다. 마리에게 "결혼해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사회적 가치에 무심한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뫼르소의 행동은 상식적인 도덕 기준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부조리의 본질이 아닐까? 의미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만든 규칙과 가치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조리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뫼르소는 오히려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게 살아가는 인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덕과 법률, 규칙은 이유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뫼르소의 캐릭터는 과장된 연기를 하는 배우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드라마의 말다툼 장면을 생각해보자. 현실의 말다툼은 무질서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상대방의 대사를 기다리는 구조적 형태를 띤다. 우리는 이를 드라마적 리얼리즘으로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여긴다. 반면 드라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전개를 어색하게 느낄 것이다. 이방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뫼르소를 작가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오해하여 작품 해석에 혼란을 겪는다. 실제로는 뫼르소의 성격이 문학적 효과를 위해 과장된 것이다. 마치 흥정 시 낮은 가격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올리는 전략처럼, 작가는 극단적 캐릭터를 통해 독자 스스로 절충점을 찾도록 유도한다.


'태양'의 상징적인 의미

'이방인'에서 태양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부조리를 상징하는 강력한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카뮈는 매우 의도적으로 중요한 사건마다 이 '뜨거운 태양'을 배치한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태양은 뫼르소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부터 태양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뫼르소가 밀크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비정상적' 행동을 하는 동안, 그를 짓누르는 것은 바로 그 강렬한 태양이다. "햇빛이 흰 벽에 부서지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는 묘사는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더욱 부조리하게 만든다.

태양은 아랍인 살인에서 절정에 이른다. 뫼르소는 직접적으로 "태양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해변의 뜨거운 모래, 눈부신 햇빛, 피부를 태우는 열기—이 모든 것이 그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살인을 저지르게 한다. 태양은 여기서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부조리한 힘으로 작용한다. 뫼르소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부조리에 휩쓸린다.

재판 과정에서도 뫼르소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태양 때문이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이런 그의 태도는 사회의 이해를 벗어난다. 사회는 합리적인 동기와 이유를 원하지만, 뫼르소에게 태양은 그 어떤 합리적 설명보다 더 강력한 현실이다.

이처럼 태양은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부조리의 알레고리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초월하는 힘이자, 모든 인위적인 의미와 가치를 무력화시키는 존재다. 뫼르소는 이 태양을 처음에는 무심하게 경험하고, 나중에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즉, 어느 인간이든 태양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나와 세계 사이엔 항상 태양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루겠다.


1부와 2부의 대칭구조 - '죽음'

카뮈의 '이방인'은 구조적으로도 정말 절묘하게 짜여 있다. 1부는 작품 이전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2부는 작품 이후의 뫼르소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 두 죽음 사이에 아랍인 살인이라는 또 다른 죽음이 위치한다. 마치 죽음이 소설의 골격을 세우는 기둥처럼 작용하는 셈이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반응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관 앞에서 밀크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모습은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장면은 단순히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2부에서 그가 직면할 자신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그와 같을 것임을 미리 암시한다.

중간에 위치한 아랍인 살인은 이 두 죽음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뫼르소가 말하듯 "태양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이 살인은, 어머니의 죽음처럼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저 '일어난 일'일 뿐이다.

2부에서 그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 역시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평온함을 유지하며, 오히려 목사의 위로를 거부하고 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1부에서 어머니의 죽음에 무감각했던 그의 태도와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죽음의 무의미의 대칭구조는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부조리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사회의 관습과 도덕은 무의미해진다. 뫼르소는 이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자신이 일으킨 죽음에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그랬을 뿐'이다.
이처럼 죽음의 대칭구조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을 더욱 강렬하게 보여주는 장치로써 활용된다.

뫼르소의 삶에 대한 태도 역시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삶 앞에서도 철저히 현재 중심적이며, 사회가 강요하는 의미를 거부한다. 승진에 관심이 없고, 마리의 결혼 제안에 "상관없다"라고 대답하고, 레몽의 부탁을 그저 귀찮지 않아서 들어준다. 그러나 뫼르소의 이런 태도는 사실 가장 솔직한 삶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회가 강요하는 거짓된 의미나 가치를 거부하고, 순간의 감각과 경험에 충실하게 산다. 해변에서 느끼는 물의 감촉, 마리의 웃음소리,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이런 순간들이 그에게는 더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진정한 삶' 일지도 모른다.

뫼르소는 결국 사회가 부여한 의미가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 비록 그 삶이 사회의 이해를 벗어나고, 결국 그를 단두대로 이끌게 되더라도, 그는 자신의 진실성을 끝까지 지킨다. 마지막 순간에 사제의 위로를 거부하고, 오히려 세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나는 지금 행복하고, 이전에도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삶의 방식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마치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탐구다. 죽음의 대칭구조와 태양의 알레고리를 통해 카뮈는 우리가 직면하는 부조리의 본질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해 아랍인의 죽음을 거쳐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뫼르소의 여정은 결국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부조리를 보여준다.

뫼르소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비정상적'이고 '무책임한' 인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 비정상성에 있다. 그는 사회가 강요하는 거짓된 의미와 가치를 거부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장례식에서의 무관심, 살인에 대한 냉담함, 사형 선고에 대한 평온함—이 모든 것은 그가 부조리의 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죽음 이외에도 자연재해와 수많은 불행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부조리 앞에서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의미와 가치는 무력해진다. 뫼르소는 이 부조리를 일찍이 깨달았고, 그래서 사회의 눈에는 '이방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방성은 오히려 가장 진실된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아래는 이방인 본문, 김화영 번역가 해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소설 마지막 문단의 인용이다.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다. 삶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의 진정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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