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주권적 개인이야말로 삶의 목표죠

by 김재상

어렸을 때 봤던 학교의 도덕 교과서에선 삶의 목표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죠. 누가 행복한 삶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동의하기엔 꺼려집니다. 목표라는 단어를 살펴보죠. 삶의 목표라는 단어는 그것이 삶의 끝, 삶의 종착점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행복이 삶의 종착이라기엔, 우린 지난 1년만 되돌아봐도 수많은 행복과 슬픔을 겪었습니다. 만약 그럼에도 행복이 삶의 끝이라고 말하려면, 최고로 행복한 순간에 죽어야지만 '행복한 삶'이 가능해질 겁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죠. 이런 사고는 사회적으로 봤을 때 전체주의적인 이념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만약 90세 이상의 노인은 노동력이 없고, 행복할 확률도 낮으니 안락사를 하는 것이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회에 속한 개인들은 90세가 되는 순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사회적 압박과 불안을 겪으며 사는 것입니다. 안락사를 하는 것은 이타적인 선택, 숭고한 희생, 현명한 판단이 되는 반면, 멀쩡히 삶을 영위하는 것은 이기적인 선택, 어리석은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과가 뒤집힙니다. 최초에 그런 안락사 도덕이 만들어질 당시엔, 사회 구성원인 개인의 동의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도덕이 지속되다보면, 최초의 그 '동의'는 더이상 동의가 아닙니다. 도덕에 동의할 당시의 정신은 휘발되어 사라져버렸고, 이젠 문자로서의 도덕만이 남아서 오히려 도덕이 개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이전엔 개인들, 주권이 있는 주권적 개인들이 권력을 행사하여 도덕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도덕 그 자체가 개인들을 억압하고, 관리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정보를 조작하거나 과장하는 일종의 뉴스공장 식의 권력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식의 권력을 가진 권력자, 권력 주체가 없는 경우에도 권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이상한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모든 국민이 주권을 갖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이 사회의 권력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도 모르고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해" 라고 믿고 수동적인 권력 행사를 하기 때문에 그렇죠. 다시말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의 과잉으로 인해, 스스로 불러온 비극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행복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면 행복은 뭘까요? 행복은 매우 모호합니다. 헌법이나 독립 선언서같은 곳에서도 '행복 추구권'이라며 국민의 아주 기본적이고 당연한 권리처럼 행복을 묘사하는데, 그 기준도 참 깊게 생각할수록 애매한 개념이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애초에 누가 박탈했기에 국가가 그걸 되돌려주고, 보장해준다는 걸까요? 아무도 그걸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박탈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 보장해주는 걸 넘어서, 행복을 실현하는 것까지 국가가 보조해준다는 식으로 생각해본다면, 그것 역시 당연하게도 말이 안됩니다. 100억원을 지원해줘도 금세 도파민의 역치가 찾아와서 행복하지 않은 게 인간이고, 고작 사탕 몇개정도만 지원해줘도 행복을 보조해줬다고 말장난을 할 수 있는 것이 '행복 추구권' 이니깐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행복이라는 것은 모두가 추구할만한 것이 못된다는 겁니다. 선천적으로 극심한 장애나 희귀병이 있거나, (자본주의 사회인만큼) 그보다 더 심한 노동력의 장애가 있다면, '진정한 행복'은 인생 내내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생각해봅시다. 진정한 행복이 뭐죠? 그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건가요? 진정한 행복이라는 일종의 행복의 고점,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이 인생에서 최대치에 달한 상태에 도달한 뒤엔 하락만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건 진정한 행복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걸까요?


이런 의문점들을 갖고, 우린 한가지 주장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즉,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주장을요.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아니고, 오히려 인생의 다른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부수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죠. 또한, 그 과정에서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정도로 행복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에요. 인류가 위험한 방사능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아시나요? 몇 명의 뛰어난 천재 과학자들이 자신의 삶의 불행을 무릅쓰고, 자립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으로 방사능 물질의 성질을 기록하고 방사선으로 실험을 하며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이 쇼츠 중독이나 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나서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할 때에도, 그 생산적인 일은 쇼츠에 비해서 도파민이 현저하게 적게 나오는, 다시말해 불행한 일입니다. 물론, 장기적 관점에서 행복의 총량의 증가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방사능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남은 인생동안의 행복의 총량 역시 감소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더더욱 행복은 인생의 목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산적인 일을 하며 일시적인 불행을 감수하는 이유도, 행복의 총량의 증가가 아니고요.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군대에서 전역하면, 대기업에 취업하면, 그 다음엔 은퇴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죠. 너무 순진하고 얕은 사고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불행마저도 감수하는 이유는, 행복의 총량의 증대, 장기적인 행복 따위가 아닙니다. 인생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을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 진짜 우리에게 도움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사실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 밖의 부수적인 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착각하거나, 오히려 나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을 행복이라고 착각하죠. 정신분석이 주는 가장 커다란 교훈은,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학계에서 권위있는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고있는 남편은 "지금 아내는 너무 지긋지긋해. 이혼하고 불륜녀랑 결혼을 하면 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행동을 수행하고 나선 어떨까요? 아내랑 이혼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감정소모와 경제적 소모가 발생하고, 불륜녀가 아내가 된다고 했을 때 불륜을 하던 시절처럼 한결같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을테니 오히려 불행해질 겁니다. 그런 다음엔 남편은 생각하죠. "오! 나는 이렇게 되길 원한 게 아닌데!" 이 말엔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남편은 사실 아내와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불륜녀와 연애를 하는 이런 쫄깃한 상황이 지속되기를 원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런 쫄깃함은 논리로,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만 포착되는 것이기에 이성은 전혀 다른 판단(쫄깃한 상황의 끝)을 내리는 거죠. "군대에 있으니 너무 답답하네.. 전역하면 정말 열심히 살거야!" 대부분은 헛소리입니다. 아직 가능성이라는 퍼텐셜에너지가 최대로 높은 상태인 현 상황이 지속되길 바라는 것이지, 그 에너지를 실제로 사용해서 자기 계발을 하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원한 것이 자기계발하는 갓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를 경험합니다. 게임, 잠, 쇼츠로 중독된 무기력한 자신을 경험하는 거죠. "오! 나는 이렇게 되길 원한 게 아닌데! ....."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정보가 과잉되고 AI가 양산한 텍스트가 넘쳐나는 요즘 시대엔 인문학과 철학이 어느 시대보다도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자연과학, 공학, 인공지능 등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니 오히려 이들에게 더욱 인문학이 필요합니다. 단지 공부나 업무 중에 겪는 좌절이나 상사의 갑질로 인해 손상되는 멘탈을 지키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분야와 같은 방향의 더 과학적이고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도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데에 반해, 철학은 그 설명 체계가 조직된 방식을 설명합니다. 그렇기에 철학은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이런 근본적인 질문 없이 그저 과학의 옥상층에서만 활동하던 사람들은 반드시 1층도 방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은 인과 관계와 몇가지 당연한 것들, 더이상 원인이 뭔지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전제로 상정하고서 자연에 접근합니다. 철학은 그런 당연한 전제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 과정에서 그 당연하지 않음이 어떻게 조직되는지, 당연함은 어떻게 조직되는지 드러내고요. 이런 점들은 우리가 잘 모르고있던 것이지만,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고민들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로 인해 철학이 시급하지 않다는 건 너무나도 비탄스러운 점이네요.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위험이란, 교묘히 섞인 실용주의적 행동주의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람들이 "오! 세상에, 아프리카에선 아직도 아이들이 굶어죽고, 나는 세금 계산을 해야하고, 시험공부를 해야하고, 커뮤니티와 뉴스를 보며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하고.. 또한 나는 이런 멍청한 철학적 토의에 시간을 써야하고.." 이런 형식의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정말 큰 위험입니다. 글 전체의 결론을 늦게나마 밝히자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 주권,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타인이 신체를 구속하는 식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담론에 의해, 특히나 저런 실용주의적 담론에 의해 교묘하게 구속됩니다. 이런 담론들이 원래부터 나쁜 의도로 만들어진 건 아니지만, 이젠 그 종합적인 작용을 고려했을 때 나쁜 것이라고 말해야만 하겠습니다. 진정한 주권적 개인이 되기 위해선 실용주의적이고 행동주의적인 담론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담론의 질서에서 벗어나서, 실용적이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용기를 가져야 해요.



"그냥 해! 생각하지 말고." 라는 문구는 오늘날의 우리에겐 들어맞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진정한 주권적 개인인 우리는, 멈추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은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주권적 개인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목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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