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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말킴 Nov 21. 2019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대답들

대략 800km를 아무 준비 없이 시작한 대략 난감한 순례길 체험기

순례길을 왜 가려고 하는 걸까요?

    어찌 보면 순례길을 가려고 계획하기 전에 그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 질문. 하지만 그 답을 명확하게 내리지 않은 채 길을 걷기 시작했고, 가는 도중에도, 목적지인 산티아고를 눈 앞에 두고도 계속해서 이 질문을 되뇌었습니다. 같은 질문을 두고도 그 답은 시간에 따라 달라졌어요. 순례길을 완주하고도 한 달쯤 지난 이 시점에서 이 질문에 대한 각각의 답들을 한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첫 번째 대답: 언제 또 해보겠어.


    6개월 세계여행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그 중간 일정에 끼워 넣으면서는 '왜 산티아고 순례길을 갈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산티아고 순례길 가고 싶어.' 였어요. 이유보다는 가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였어요. 산티아고 순례길이 정확히 얼마나 걸어야 하는 것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는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스페인에 있는 조금 긴 길이라는 것. 최근에 방송에서 꽤 자주 나왔다는 것. 그리고 나는 100km 행군을 아주 잘 완주했던 군인이었다는 정도.(?) 돌이켜보면 순례길을 가고 싶다는 그 마음은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온 순간이 아닐까요. 아니면 그냥 내 무의식에 떠다니는 막연한 도전 목록 중 어쩌다 얻어걸린 단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단 스페인으로 가는 비행기부터 질렀습니다.


    순례길 시작 한 달 전, 순례길에 대한 정보들을 막 찾아보면서 (이제야..) 생각보다 내가 너무 이 길을 간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략 800km의 이 긴 거리를 군대의 2박 3일 행군과 비교했었으니까요.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고 일정을 짜기 위해, 순례길을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글들을 보면서 처음 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고생길이 뻔한 이 길을 '왜 내가'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차라리 행군을 해보지 않았었더라면 몰랐을 길 위의 희로애락을 저는 이미 알고 있는 몸이었습니다. 꼬박 35일간 매일 행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글을 읽는 모든 대한민국 예비역들은 자연스레 몸이 움츠러들고 순례길에 대한 생각이 슬그머니 다시 저 먼 무의식의 안드로메다로 숨어버릴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한창 빠져있던 코딩 공부를 핑계로 순례길을 접을까도 생각했었어요. 순례길을 걷는 한 달 이상은 공부를 못할 테니까요.(기어코 순례길에 맥북을 들고 간 멍청이는 겨우 이틀 공부하고 나머지 기간 내내 내가 평생 지고 갈 멍청함이다 하는 마음으로 지고 다녔다는 슬픈 이야기..)


    그래도 결국 순례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왜냐면,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 달 이상 걸리는 일정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에게는 가보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긴 시간이니까요. 내년이면 이제 30대.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취업을 해야 하고, 이제는 퇴사를 한다 하더라도 세계여행보다는 다음 직장을 더 고민하게 되겠죠? 도전보다는 현실이 더 무겁게 느껴질 거예요.(아직 30대로 안 살아봐서 모르겠지만) 더 시간이 흐르면 출산, 육아처럼 가족의 미래에 대한 더 진지한 고민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그만 생각하기로 하자)


    그래서 20대의 마지막을 기념하면서, 스스로에게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만들어주자고 생각한 거지요. 나중에 30대를 돌이켜보는 나이가 되면 20대나 30대나 다를 게 없다고 할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의 나에겐 29살은 조금 특별했으면 했습니다.



 

    두 번째 대답: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워서


    준비 없이 스스로의 체력에 자만하며 시작해서였을까요. 첫날, 피레네 산맥의 맨 꼭대기에서 물집이 잡혔습니다. 처음에는 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발가락에 작게 꿈틀거리는 그 물집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조금씩 그 존재감을 어필하던 물집은 길을 나선 지 8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이제는 제발 오늘 머물 숙소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천번을 되뇔 때는 강력한 존재감을 내뿜었습니다. 겨우 겨우 론세스바예스의 숙소에 도착하고는 생소한 풍경들, 마치 전 세계에서 단체로 고등학교 수학여행에 온 듯한 분위기, 드디어 씻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해방감 때문에 물집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어요.


    하루 이틀 지나면서, 순례길의 분위기에도 어느 정도 적응되기 시작했습니다. 환경에 점점 적응하는 만큼 첫날 느꼈던 신비로움은 점점 사라졌고 사라진 그 빈자리는 물집의 고통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어요. 물집은 흔히 생기는 거라서 그 고통을 간과하기 쉽지만, 매일매일 걸어야 하는 사람에게 물집은 정말 극심한 고통이에요. 하루에 평균 3~4만 걸음을 걷는데 그 모든 걸음에서 고통이 느껴진다면 상상이 될까요?(안 겪어보면 모를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는 제 아내도 공감을 못하더라고요) 어김없이 그럴 때면 질문이 스멀스멀 올라오죠. 나는 왜 여기에 왔지?


    순례길 시작하고 물집 때문에 너무 힘들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런 준비 없이 무턱대고 시작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느끼는 황홀함 사이에서 문장으로 마침표 찍어지지 않는 복잡한 감정들이었습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정말 그 이유가 궁금하기보다는 왜 왔을까 하는 자책의 질문. 답하지 않아도 발가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자연스럽게 '아 왜 왔지..' 하는 물음표를 찍을 필요 없는 질문.


    그런데 사실 그 자책에도 정말 자책하는 마음은 크지 않았어요. 눈 앞에 보이는 순례길이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물집 정도의 고통은 덮고도 남을 아름다움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길 위에서, 반짝이는 새벽 별빛, 구불구불 자라 있는 포도 덩굴, 연녹색 잎사귀를 흔드는 올리브 나무, 그 속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들, 뜨거운 햇살과 가끔씩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 물집이 안 아팠다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진짜 너무 아팠어요. 그런데 순례길은 진짜 더더더더더 아름답다는 거죠.


    그럼에도 자책하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고통에 대한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랄까요? 나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적인 말. 그래서 뭔가 저한테는 그 순간이 복잡하게 느껴졌어요. 발가락은 너무 아픈데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진 않고 (오히려 즐겁고) '여길 왜 왔을까' 하면서도 다음에 또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그런 복잡함입니다. 물집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어 절뚝대면서 초췌한 차림으로 저녁거리를 사러 갈 때는 정말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걸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납니다. 그래도 얼굴은 아마 웃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자책 가득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굳이 하자면 순례길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발가락 물집은 결국 신발을 새로 하나 장만하고서야 해결되었어요. 지금 신고 있는 신발보다 무려 3 치수나 큰 신발로 바꾸고 양말도 엄청 헐렁한 양말로 바꿔 신었죠. 그랬더니 물집 통증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가라앉더라고요. 순례길 4일 차에서야 제대로 순례길을 시작을 준비를 마친 거지요.




    세 번째 대답: 오직 그 분만이 아시리!


    처음에 이 길을 시작할 때는 완주에 크게 목표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 길을 걸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 작은 순간들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목표만 향해서 달리다 보면 주변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쉬우니까요.(발리에서 요가하면서 배웠죠) 그래서 처음에는 일부러 조금 느리게 걸었던 것 같아요. 느린 걸음을 유지하면서 순례길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순례길을 조금 알 것 같아'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순례길을 온 이유보다는 순례길 그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그냥 걷는 거죠. 아침이라기엔 조금 이른 새벽에 일어나 빵 하나 입에 물고 별을 보며 길을 나서고, 조금 지친다 싶을 때쯤 바르(bar의 스페인어 발음입니다)에서 카페 꼰 레체(cafe con leche, 카페라테입니다)를 시켜 마시고, 가장 뜨거운 3시의 태양빛을 견디며 조금 더 가면 숙소에 도착. 짐을 풀고 씻고 해지는 걸 바라보며 저녁을 먹고, 다음날을 위해 호랑이연고를 발, 종아리, 허벅지, 어깨 등 골고루 발라주고 휴식을 취합니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지만, 매일매일 새로운 길을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걸어요.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에는 순례자들이 가져왔다가 놓고 간 책들이 많아요. 한 알베르게에 순례길에 대한 책이 있었는데, 그 책에서 본 시를 한 편 소개할까 합니다. 나바레라는 마을로 가는 길 담벼락에 적혀있다고 하네요.(아마 그때 힘들어서 땅만 보고 걸었는지 못 보고 지나쳤어요) Eugenio Galibay Baños라는 사제가 쓴 시입니다.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잘 번역되어 있는 시를 가져왔어요.

    

순례자여, 누가 그대를 부르는가?


먼지, 진흙, 태양, 비
그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수많은 순례자, 수많은 세월의 길

순례자여, 누가 그대를 부르는가
그대를 이끄는 알 수 없는 힘은 무엇인가

별들의 들판 콤포스텔라,
위대한 대성당,
나바라의 용기,
리오하의 와인,
갈리시아의 해산물,
까스띠야의 들녘도 아닐진대

순례자여, 누가 그대를 부르는가
그대를 이끄는 알 수 없는 힘은 무엇인가

순례길의 사람들,
시골 마을의 정취,
역사와 문화,
깔사다의 수탉,
가우디의 궁전,
폰페라다 성도 아닐진대

걸으며 지나치는 이 모두가 기쁨이라도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는 더 깊은 곳에 있다네

나를 밀어주는 힘, 나를 이끄는 힘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
오직 그 분만이 아시리!


(출처: 알리의 다시 한번 까미노, https://blog.naver.com/ali_cho/221408892979)
담벼락의 시

   

    '걸으며 지나치는 이 모두가 기쁨이라도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는 더 깊은 곳에 있다네' 이 시는 아름다운 자연을 보는 즐거움 그 이상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합니다. '나를 밀어주는 힘, 나를 끌어주는 힘.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신 만이 아실 거라고 하네요. 

    

    분명 이 길을 걷게 된 이유는 있겠지만, 우리는 알 수 없어요. 우리는 이유를 모른 채 많은 걸 합니다. 인생도 그렇잖아요. 왜 태어났는지 태어날 때부터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다 문득 그 이유를 찾기도 하고, 답을 내릴 수 없어 절망하기도 해요. 우리가 이유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이유를 모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걷는 것 밖에 없어요.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사건을 돌이켜 보며 과거로 생각을 보내지 않았어요. 이 길의 끝에 있을 성취를 예견하면서 미래로 생각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길을 걷는 이 순간, 내가 밟고 있는 이 땅,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 집중하면서 걸을 뿐이에요. 


    이유를 찾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오가지 않고 오롯이 현재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찾을 수 있는 이유를 모르는 것이라면 불안하겠지만, 원래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면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래부터 우리가 답할 수 없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나니 한결 더 자유로워집니다. 


    혹시나 순례길을 왜 갈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가보라고 하고 싶어요(본격 순례길 홍보 글).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순례길을 가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요. 


    (참고로 이 시는 스페인의 PEÑA EL SALERO란 협회에서 주최한 문학 콘테스트에서 2등을 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또 구글에 검색해보면 이 시를 공유한 많은 글들이 나오는데요, 아마 이유를 모른 채 걷고 있는 순례자들이 저 말고도 많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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