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를 바꾸기로 했다, 유럽에서
동기들은 과장으로 승진하고 집도 사고 가정을 이룰 때, 나는 네덜란드에서 논문과 씨름하며 인턴 자리를 구걸(?)하고 있었다. 24살, 세 번째 인턴 딱지를 뗐을 때만 해도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이번 생에만 벌써 네 번째 인턴십을 시작하게 됐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10월부터 시작된 구직 활동은 16번의 거절과 단 1번의 승리로 기록된 멘탈 탈탈 털리기의 연속이었다. 연말 연초는 포르투갈에서 보냈는데, 새해가 되자마자 매일같이 악몽을 꿨다. 하루는 서류에서 광속 탈락하는 꿈, 다른 하루는 면접관이 '네가 감히 여기 지원하냐'며 면전에서 무안을 주는 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엔 늘 식은땀에 젖어 눈을 뜨는 게 일상이었다.
17번의 문을 두드리다: 전략적 직무 분석.
지원을 위해 나의 커리어 목표를 두 가지 핵심 키워드로 요약하고, 지원 현황을 세 가지 클러스터로 분석했다.
1. 커리어 목표의 핵심 키워드
1) Culinary R&D & Innovation: 조리 과학의 학문적 깊이와 현장 경험의 결합
2) Food Science & Consumer Bridge: 데이터 기반의 소비자 행동 분석
2. 직무 클러스터링 분석
1) Cluster A: Consumer & Market Insight (약 45%)
- 주요 지원처: 컨설팅 or Research (Unilever, MMR, Innova market insight, FrieslandCampina)
- 전략: 데이터 기반 연구 역량을 증명하려 했던 시도.
2) Cluster B: Culinary & Innovation (약 30%)
- 주요 지원처: Unilever, Kraft Heinz, Factor_
- 전략: 조리 & 감각 연구 전문성을 실무에 투영하려 했던 시도.
3) Cluster C: Product Quality & Product Development (약 25%)
- 주요 지원처: Danone, Givaudan, Arla Foods, Heineken, Mondelēz
- 전략: 현재 전공 바탕으로 지원 범위를 넓혀 안정성 확보.
왜 하필 이 직무인가: AI 시대의 생존 전략
17번의 지원 중 가장 끌렸던 직무는 단연 Culinary & Innovation이었고 결국 합격하였다. 자사 제품으로 새로운 레시피와 호스트 푸드를 개발하고 프레임워크를 개발해 B2B 고객들에게 Upselling Point와 Reason to Believe를 설득하는 이른바 Culinary + Marketing strategy가 결합된 매우 유니크한 R&D 포지션이다.
현재 네덜란드도 AI로 인해 채용률이 줄고 레이오프가 이어지는 상황이지만, 나는 확신했다. 직접 손으로 요리하고,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며 프레젠테이션으로 감각을 설득하는 일은 쉽게 자동화되지 않는다. 이 직무야말로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인간 본연의 영역이라 믿었기에 가장 매력적이었다.
물론 면접관들은 내 다채로운 이력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왜 물류회사를 다니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요?" "식품 품질을 전공하면서 왜 굳이 이 직무에 지원했나요?" "완전 오피스직이 아니고 셰프들과 키친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예상했던 질문들이었지만 날카로웠다. 나는 단순히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 대신, 내가 가진 이력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 단순히 요리만 하는 사람이 아닌, 공급망과 시장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전략가로서 나를 정의했다.
"물류 경험이 있기에 식재료 공급망과 현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시안 쿠킹 워크샵과 K-food 팝업 운영 경험을 통해 현지인들의 입맛에 최적화된 소스를 개발해 온 실전 감각이 있습니다. 여기에 품질 전공자로서의 전문성을 더해, 조리 단계에서의 맛을 균일화하고 품질 관리 공정을 시스템화할 수 있는 역량까지 갖췄습니다."
결국 마지막엔 팀 리더가 "우리 팀은 새 팀원이 오면 그 나라 요리를 직접 만들어서 다 함께 테이스팅 하는 문화가 있어. 곧 네가 만든 한국 음식을 먹어볼 날을 기대하고 있을게."라고 말하고 면접이 마무리되었다. 10월에 지원한 포지션, 매월 한차례 씩 면접을 진행했고 1월이 되어서야 합격 결과를 받았다. 이렇게 장장 3개월이 걸린 인턴 구직이 마무리되었다.
전직 HR 담당자의 이력서 생존법 [주관주의]
현지인들도 고전하는 이 시장에서 외국인인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한 끗 차이의 전략이 필요했다.
감사하게도 과거 HR에서 일했던 경험 덕분인지 (?) 주변보다 서류 합격률이 꽤 높은 편이어서 친구들도 나에게 CV + Resume check을 왕왕 요청해 왔다.
1. 도구의 선택: 현재 채용 트렌드에서 멀티내셔널 기업들은 대부분 ATS(Applicant Tracking System)라는 AI 프로그램을 통해 CV를 1차 필터링한다. 여기서 도구의 선택이 중요해진다.
Canva: 디자인은 예쁘지만, 텍스트가 이미지로 처리되거나 레이어가 복잡해 AI가 내용을 제대로 읽지 못할 위험이 크다.
MS Word: 가장 안전하지만, 디자인적으로 세련된 느낌을 주거나 정교한 레이아웃을 잡기에 한계가 있어 가독성이 떨어지기 쉽다.
Overleaf (강추): 온라인 기반의 LaTeX(레이텍) 편집기로 코딩하듯 문서를 작성하기 때문에 레이아웃이 절대 깨지지 않고 극강의 깔끔함을 자랑한다. 이미 잘 만들어진 고퀄리티 템플릿이 많아 가독성 높은 이력서를 만들기에 최적이며, 텍스트 기반이라 AI(ATS) 인식률도 매우 완벽하다. (코딩을 안 해봤어도 괜찮다. ChatGPT가 잘 알려준다.)
2. 사진과 일러스트의 전략적 활용: 기업의 성향에 따라 시각 요소 활용법이 달라야 한다.
보수적인 더치 기업: 신뢰감을 주기 위해 단정한 사진을 넣는 것이 권장될 때도 있다. (but 케바케)
멀티내셔널 기업: 다양성을 존중하고 편견을 배제하기 위해 사진 부착을 권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수백 개의 CV 사이에서 나를 각인시키기 위해 사진 대신 나를 닮은 깔끔한 일러스트를 넣고, CV 전체의 메인 컬러와 톤을 통일했다. 이는 사진이 주는 선입견은 피하면서도, 무미건조한 텍스트 뭉치 사이에서 "아, 그 일러스트 있던 지원자!"라고 기억하게 만든 장치였던 것 같다. (특히 기획력과 디자인 능력을 요하는 컨설팅펌들이 좋아했다.)
다시 시작하는 문턱에서
한국적 잣대로는 늦깎이라는 수식어가 이미 붙고도 남았겠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은 전혀 달랐다. 네덜란드에서 면접을 보며 가장 해방감을 느꼈던 지점은, 내 나이가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면접관들은 내가 늦은 나이에 도전을 한다는 식의 가상한 시선조차 없었다. 그들에게 나이라는 숫자는 평가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저 '당신이 쌓아온 그 경험들이 우리 팀에 어떤 실용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만이 존재했다. 내가 어떤 삶을 지나왔든, 내가 쌓아온 지식과 경험 그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나를 더욱 당당하게 만들었다.
물론, 인턴 하나 구하는 데 3개월이 걸렸다. 석사 졸업을 위해서는 인턴이 필수인데 아직 주변 친구들의 80%는 인턴을 못 구한 상태다. (유러피안조차도 쉽지 않다.) 채용 시장이 얼어붙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취업은 또 얼마나 힘들까.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막막함도 있다.
그럼에도, 이 나이에 새롭게 배우는 설렘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좋다. 인턴이 네 번째면 어떤가. 혹시 나이 때문에, 혹은 계속되는 거절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면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두드려보길 권한다. 문은 생각보다 엉뚱한 곳에서 열리기도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