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요] 유엑서로 일하고 싶어요 #055

by UX민수 ㅡ 변민수


디자이너(d)가 자신의 커리어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은 대개 특별한 사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어느 날 명함 제작을 부탁받고, 다음 날 발표자료를 다듬고, 그다음 날은 간단한 배너 수정을 요청받는다. 모두 디자인(d)과 관련된 일처럼 보이고 틀린 것만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 묻게 된다.


내가 쌓아온 전문성은 어디에 쓰이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업무 불만이 아니다. 자신의 역할과 가치가 흐려지는 경험, 그리고 앞으로 무엇으로 인정받게 될지에 대한 불안이다. 특히 UX라는 영역으로 이동하려는 시점에서 이 질문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 글은 그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조직 안에서 디자이너(d)의 역할이 어떻게 정의되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마주한 더 큰 변화는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역할의 확장인가, 전문성의 희석인가


UXer로의 전향을 고민하는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품는 불안이 있다. 그동안 공들여 쌓아 온 시각화 역량이 과연 그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 혹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우려다. 특히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거나 GUI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UX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래픽 작업의 비중이 줄어드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까 걱정하게 된다.


이러한 불안은 단순한 직무 변화에 대한 고민만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d)들이 경험하는 것은 ‘역할의 변화’라기보다 ‘전문성의 희석’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는 디자인(d)에 대한 전문적 이해를 가진 사람이 드물다 보니, 미감과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이 디자이너(d)에게 몰리는 경우가 흔하다. 명함 제작, 간단한 배너 수정, 문서 편집, 발표자료 꾸미기 같은 업무들이 반복되며, 본래 의도했던 디자인(d) 역량이 아닌 ‘시각적 허드렛일’의 담당자처럼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문제는 이러한 경험이 단순한 업무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이너(d) 스스로 자신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혼란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내가 하는 일이 디자인(d)인지, 단순 제작인지, 혹은 조직의 부족한 미적 감각을 보완하는 역할인지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조직이 정의하는 UX의 실제 모습


UX를 교과서적으로 정의하면 사용자 경험 전반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조직 안에서 UX 역할은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조직 구조에 따라 UX의 범위는 크게 달라진다.


대기업처럼 역할이 세분화된 환경에서는 그래픽 작업을 전담하는 인력이 따로 존재하고 UX는 구조 설계나 서비스 흐름, 협업 중심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경우 시각화 업무는 줄어들지만 대신 설계와 의사결정의 책임이 커진다.


반대로 작은 조직에서는 상황이 정반대가 되기도 한다. UX, UI, 그래픽, 편집, 심지어 브랜드 관련 작업까지 하나의 역할로 묶이는 경우가 많다. 이때 디자이너(d)는 사용자 경험 설계자라기보다 ‘시각 문제 해결사’로 기능하게 된다. 디자인(d) 역량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업무가 집중되고, 그 결과 전문 영역을 깊게 탐구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UX라는 직무는 고정된 역할이 아니라 조직이 필요로 하는 문제 해결 방식에 따라 계속 재정의되는 포지션이다. 디자이너(d)의 고민 역시 이 유동성에서 비롯된다.



다학제 영역으로서의 UX와 커리어 선택


UX는 본질적으로 다학제적 영역이다. 리서치, 전략, 인터랙션 설계, UI 구현, 서비스 기획 등 다양한 역할이 공존한다. 따라서 UXer가 된다는 것이 시각화를 완전히 내려놓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시각화 역량은 협업 과정에서 중요한 기반이 된다.


디자인(d) 이해도가 높은 UXer는 GUI 디자이너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고, 개발자와의 협업에서도 구현 가능성을 고려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직접 손으로 디자인(d) 하지 않더라도 시각적 완성도를 판단하는 능력 자체가 설계의 품질을 높인다.


또한 작은 조직에서의 폭넓은 경험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면서 제품과 서비스 전반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험이 의도된 성장 과정인지, 아니면 역할 경계가 부재한 환경에서 소모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일이다.


결국 UX 커리어는 “무엇을 하지 않게 되는가”보다 “어떤 전문성을 축적할 것인가”의 문제에 가깝다. 시각화 중심의 전문가가 될 수도 있고, 전략과 구조 설계 중심으로 성장할 수도 있으며, 두 영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선택할 수도 있다.



디자이너의 진짜 위기: 역할이 아니라 AI


사실 오늘날 디자이너(d)의 위기를 논할 때 단순히 조직 내 역할 분담만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더 큰 변화는 기술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 디자이너(d)의 불안이 ‘잡무화’나 ‘전문성 희석’에서 비롯되었다면, 지금의 위기는 자동화 가능성이다.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 자체는 점점 빠르게 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이미지 생성 AI, 자동 레이아웃 도구, 디자인 시스템 자동화 등은 과거 전문 영역으로 여겨졌던 작업들을 빠르게 평준화시키고 있다.


이 변화 앞에서 중요한 질문은 시각화를 계속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시각화를 넘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어떤 문제를 정의할 수 있는가, 어떤 경험을 설계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결과물을 만드는 능력보다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결국 디자이너(d)의 전문성은 더 이상 도구를 다루는 기술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사용자와 조직, 기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설계하는 능력으로 재정의되고 있다.



전문성은 역할이 아니라 위치의 문제다


UXer로 전향한다고 해서 시각화 역량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역량이 발휘되는 방식이 달라질 뿐이다. 어떤 조직에서는 직접 손으로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고, 어떤 조직에서는 방향을 설계하고 의사결정을 이끄는 사람이 될 것이다.


결국 커리어는 직무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 인가로 정의된다. 작은 조직에서의 역할 혼란이나 업무 범위의 확장은 디자이너(d)가 자신의 전문성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묻는 과정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그 질문은 기술 변화라는 더 큰 흐름 속에서 다시 제기되고 있다.


시각화를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대에서, 이제는 무엇을 설계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UX라는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의하는 일, 그것이 오늘날 디자이너(d)에게 요구되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디자인(d) 전문성도 디자인(D)과 연계하지 않을 수 없다.




디자이너(d)의 커리어는 늘 변화 속에 있었다. 한때는 도구를 다루는 능력이 경쟁력이었고, 이후에는 시각적 완성도가 기준이 되었으며, 이제는 문제를 정의하고 경험을 설계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작은 조직에서의 역할 혼란도, 업무 범위의 확장도, 기술 변화의 압력도 결국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나는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인가.


디자인(d)이라는 직무의 경계는 계속 변하지만, 사용자와 세계 사이의 더 나은 관계를 설계하려는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전문성은 특정 작업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다시 정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지금 디자이너(d)에게 필요한 것은 역할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도 의미 있는 경험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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