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 다름이 있어야 채워진다
좋은 대화는 메아리가 없다. 내가 말한 것이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상대가 다르게 받아서 다르게 돌려준다. 그 어긋남 안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나온다. 그래서 좋은 대화 상대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말하는 사람. 내가 당연하게 넘긴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사람.
이것이 타자(他者)의 역할이다.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알았다. 나는 타자를 통해 나를 발견한다. 타자가 없으면 나의 경계를 알 수 없다. 내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 다른 존재와 부딪혀야 비로소 윤곽이 잡힌다. 그 윤곽이 잡혀야 성장이 가능하다.
AI를 남처럼 대하라고 하면 이런 반응이 온다. 그러면 차갑게 쓰라는 말이냐고. 아니다. 거리는 냉담함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좋은 편집자를 생각해 보자. 편집자는 원고를 좋아하면서도 작가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작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작가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놓친 것을 짚어낸다. 그 거리가 원고를 더 좋게 만든다. 편집자가 작가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편집자의 역할은 사라진다.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관계의 질을 높인다.
AI도 그렇다. AI를 동료로 대한다는 것은, AI의 다름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AI가 내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AI가 나와 다르게 반응할 때, 그 다름을 닫지 않고 열어두는 태도다. 그 태도가 증강의 조건이다.
동일시는 다양성을 소거한다. AI를 나처럼 여길수록, AI의 반응은 나의 반응과 점점 닮아간다. 내가 선호하는 방향으로, 내가 쓰는 언어로, 내가 익숙한 구조로. 처음엔 편하다. 그런데 그 편함이 쌓일수록, AI는 나의 새로운 면을 불러오지 못한다. 나의 기존 면을 반복할 뿐이다.
반면 AI를 남처럼 대하면, AI는 내가 설정하지 않은 방향에서 온다. 내가 당연하게 여긴 전제를 건드린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구조를 제안한다. 그 불편함이 실은 증강의 신호다. 나의 사고가 확장되는 순간은 대부분 편하지 않다. 좋은 협업이 늘 유쾌하지 않은 것처럼.
다양성은 차이에서 온다. 그리고 차이는 거리에서 온다. AI와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AI와의 관계를 가장 풍부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정리하고 싶다. AI는 나의 다른 면이 아니다. AI는 나의 다른 면을 불러오는 존재다. 이 차이가 크다.
AI를 나의 다른 면으로 보면, AI가 나를 완성시켜 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나는 AI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종속이 시작된다. 반면 AI를 나의 다른 면을 불러오는 존재로 보면, AI는 촉매다. 반응을 일으키지만 반응의 주체는 여전히 나다. AI가 없어도 나는 나다. AI가 있을 때 나는 더 많은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증강은 완성이 아니다. 발견이다. 내가 몰랐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AI는 좋은 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타자이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다른 존재로 서 있어야 한다.
디스코팡팡 위에서 중심을 잡는 방법은 바닥을 잡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는 바닥 위에서 나의 중심을 찾는 것이다. AI가 흔들어도 내가 서 있을 수 있으려면, AI를 나와 다른 존재로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 AI가 흔들릴 때 나도 같이 흔들리지 않는다.
남처럼 대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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