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알 수 없는 드라마
멘토링은 대체로 짧고 선명한 순간으로 끝난다. 질문은 때론 날카롭게 다가오고, 조언은 그 순간에는 적절한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나면 두 사람은 각자의 시간으로 흩어진다. 멘티의 시간축에는 새로운 정보, 관점, 용기가 더해져 앞으로 흘러가지만, 멘토의 시간축에서는 멘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공백이 바로 이 관계를 규정하는 독특한 구조다.
멘토는 자신의 말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영영 알 수 없다. 멘티가 말해주기 전까진 말이다. 따라서 도움이 되었는지, 오히려 부담이 되었는지, 변화의 실마리가 되었는지조차 실제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관계의 끝이 명시되지 않은 채로 수평선에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멘토가 계속해서 멘토링을 할수록 이 ‘사라짐’은 쌓이고, 어느 순간 텅 빈 절벽처럼 선명해진다.
멘티의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어떤 말은 하루를 바꾸고, 어떤 설명은 직무 전환을 결심하게 만들고, 어떤 한 문장은 몇 년 뒤에야 비로소 의미가 완성되기도 한다. 즉, 멘토링의 결과는 멘티의 시간축 위에서만 진화한다. 그 시간축에 멘토가 있더라도 멘토를 이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멘토의 시간은 멘토링 직후부터 멈춰버린다. 조언을 건넨 뒤에는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내게 된다. 그 이후의 변화를 추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추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능한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을 지양하는 내 철칙 상 궁금증은 오롯이 내 몫이다. 이 불균형은 멘토링을 더 어려운 감정적 노동으로 만든다. ‘도움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이 반복될수록, 멘토는 무향·무기록의 시간 속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멘토링의 절벽은 이 비대칭에서 비롯된다. 멘토의 말은 멘티에게는 씨앗이지만, 멘토에게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심은 뒤에 그 흙을 떠나버리는 것처럼, 결과는 볼 수 없고 책임도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멘토링은 어느 순간부터 ‘말을 건네는 자리’가 아니라 말을 흘려보내는 자리가 된다.
이 절벽의 가장 잔인한 지점은, 잘 되었더라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멘티는 성장한다. 어떤 멘티는 전환점에 서 있다가 조언 한 줄로 길을 바꾼다. 그런데도 멘토는 그것을 모른다. 마치 끝없는 절벽 아래로 무엇인가 떨어지지만, 땅에 닿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멘토링을 오래 할수록, 이 구조적 ‘공백’은 피로를 만든다. 열심히 했다는 감각이 쌓이지 않는다. 수고를 평가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멘토링은 어쩌면 성취가 아니라 직관으로 유지되는 활동일 수도 있는 것 같다. 그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맞다’는 신념으로 버티는 일 말이다.
그러나 신념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멘토링은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질문이지만, 멘토에게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책임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멘토링의 절벽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침묵일 것이다.
그럼에도 멘토링은 계속된다. 왜일까? 아마도 멘토링은 확신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선순환을 위한 신념 활동이기 때문이다. 멘티의 변화는 멘토에게 곧바로 돌아오지 않지만, 언젠가 다른 사람을 향해 다시 흘러간다. 멘토의 시간축에는 멘티가 사라지지만, 멘티의 시간축 어딘가에는 멘토의 목소리가 남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귀하게도 누군가는 약속의 소식을 들고 언젠가 연락을 해온다. 그 기쁨은 모든 부채를 감당하고도 남게 만드는 엄청난 에너지다.
절벽처럼 보이던 그 지점은 사실 흐름의 단절이 아니라,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멘토링의 절벽은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흘러가는 경계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