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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Jun 25. 2019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깐깐하지만 속내 깊은 할머니 작가의 에세이 

검은 턱시도 고양이가 그려진 초록색 표지, 감성적인 디자인에 혹해 구입했다면 의외로 만만찮은 내용에 당황할 수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들처럼 절대 술술 읽히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SF계의 거장 어슐러 K 르귄 바로 그녀다. 지난해 88세의 나이로 작고하기 전 비교적 최근에 쓰여진 에세이라서 그런지 제목부터 의미심장하고, 내용들 또한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한다.


모교인 래드클리프 컬리지가 하버드와 합병되는 바람에 받아든 졸업 60주년 동창회 관련 설문조사 문항에 도사린 WASP의 허위의식을 낱낱이 깨는 ‘당신의 여가시간에’로 시작되는 1장 '여든을 넘기며'부터 만만치 않다.


미국 동부와 유럽을 오가며 수학했던 비판적 지식인이자 인류, 지구의 틀에 갇힌 세계를 넘어 타자를 포용하는 새로운 세계관의 우주를 창조했던 탁월한 작가. 환경에 대한 세심한 생각들에 어느덧 조롱과 증오의 대상이 된 페미니즘, 여성들의 연대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믿음, 수십년간 함께 일했던 비서에 대한 추모... 뭐 하나 쉽사리 넘길 수 없는 이슈를 따라가느라 조금 힘에 부칠 때면 보호소에서 데려온 턱시도 고양이 파드에 대한 일화가 등장해 작은 웃음을 준다.


명석하고 깐깐하면서도 편견이 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할머니. 그녀는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십대 청소년이 사실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가 '틈을 찾아냈기를, 스스로 여가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안으로 빠져나갔기를, 그 내면 깊이 사유하고 느끼고 있는 중이기를' 축복하는 현명한 나이든 사람이었다.


책 제목인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는 물리적으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바쁘다는 뜻이라고 한다.


P19 내 삶에서 시간을, 아니 시간 비슷한 것은커녕 ‘할 일이 없는 시간’이란 찾아낼 수 없다. 나는 자유롭지만 내 시간은 그렇지 않다.


잠을 자고, 백일몽을 꾸고, 읽고, 시를 짓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만나고, 여행하고, 명상하고, 고양이에게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의 공간을 점령당하느라 완전하고도 지극히 바쁘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나이를, 세월을 부인하느냐면 그렇지 않다. 젊음을 숭상하는 사회, 노인에게도 ‘마음이 늙지 않았으면 안 늙은 것’이라며 건강에 좋은 음식을 골라 먹으며 아침마다 달리기를 하라고 권하는 세상에 그녀는 이야기한다. 계단을 올라가지 못하거나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을 나약함의 상징이라 여기는 세상에 호통을 친다.


P23 날 봐라. 나는 그들에게 호통을 친다. 난 뛰지도 못하고, 역기도 못 들고, 꽉 끼는 천 조각을 걸친 내 모습이라면 상상만 해도 여러모로 질겁한다. 나는 나약한 여자다. 항상 그랬다. 당신네 운동 선수들이 뭔데 노년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 모두의 것이다.


다음 에세이 ‘스러지는 것들’에서도 노년기를 직면하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진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노년의 실체를 전적으로 나쁘게만 보고 노화를 부정적으로만 인식한다. 긍정적인 정신을 가진 노인들을 대하고 싶은 나머지 노인들의 현실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으례 선의를 가득 담아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어요.”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 법이래요.”


P28 내 노년을 부정하는 말은 내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다. 내 나이를 지우고, 내 삶을... 나를 지운다.


P29 노인과 함께 살아보지 않은 아이들은 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른다. 남성 노인들은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배운다. 여성 노인들에겐 벌써 20년 혹은 30년 전부터 익숙한 일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아이들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바라봐야 할 상황이라면 종종 무관심이나 혐오, 혹은 적의를 담은 시선이 느껴질 것이다. 그건 흡사 자신과 다른 동물종을 바라보는 동물들의 눈빛과 같다.


오, 나 역시 그 느낌,투명인간이 되는 느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삶의 희비를 둥글게 끌어안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낸 윗세대의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언젠가 리베카 솔닛이 더 나이가 들면 또 이런 책을 볼 수 있을까? 이미 어슐러 님은 다른 차원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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