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앞선 시대에 인간의 마음에 대해 노래했던 대문호 괴테. 괴테의 파우스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는 사뭇 다른 무거움을 전해주고 있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면서 그의 철학적 사유에 깊은 감탄을 느꼈었는데,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나니 동양적 세계관마저 아우를 수 있는 근본적인 작품을 발견한 느낌을 받았다.
가장 먼저 다루고 싶은 것은 바로 선과 악이다.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악마 메피스토는 그레트헨에게 “심판받았노라.”라고 말하고, 하늘에서는 “구원받았노라”라고 말한다. 하나의 장면에 대해 누군가는 구원이라, 다른 이는 심판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관점에 따른 상대성을 띄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파우스트를 현혹하겠다는 악마의 제안을 신은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 연인의 가족을 죽인 파우스트가 구원받는다는 점에서 ‘절대 선‘으로 여겨왔던 전통적 신의 개념이 붕괴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신과 악마의 선악의 이분법으로만 바라본다면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인간을 감성과 이성으로만 나누어 이해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던 이전 철학자들의 한계를 고스란히 따라갈 뿐이다.
그렇다면 악마의 역할은 무엇일까. 괴테 연구의 거장이자, 번역가 전영애의 말을 빌려, 조력가, 동료라는 단어로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에서의 백골을 다룰 수 있다. 백골은 일제강점기 당시 윤동주에게는 탈피하고 싶었던, 소극적 자아이다. 그러나 윤동주에게 이러한 자아는 그간 삶을 함께 해온 순수하지만, 약간 소심했던 자아였고, 당대 시대상에 의해 자신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된 자아였기에 이러한 백골과 단절하고 이상적 자아만을 지향하는 것에 슬픔을 느껴 눈물을 흘리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윤동주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부정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조화, 합일이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의 역할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나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헤세의 <싯다르타>와 같은 작품을 통해 하나의 지향을 위해서는 그와 대척점을 가지는 현실이 필수적임을 다루고 있었고, 그 과정이 욕된 것이 아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경험임을 확인하였다.
종합하면 신이 말하는 구원을 위해 악마는 꼭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정확히는 행복을 위한 노력의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 인간이 행복이라는 결실을 진정으로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지향을 가지고 방황한다. 세계를 이해하겠다는 꿈, 누군가와 동화 같은 사랑을 하겠다는 꿈, 하루라도 편히 살고 싶다는 소망 등. 이 모든 것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이상이다. 현실이 없으면 이상향이 존재할 수 없으며, 결핍이 없으면 만족이 존재할 수 없다. 신과 악마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보적 관계가 있기에 세상은 모순적이며, 그런 모순 속에 살아가는 인간 또한 자연스레 모순적 동물이 된다.
다시 상대성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관점에 따라 구원받기 위해, 혹은 심판받기 위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서 C(Choice)를 하는 존재라고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미로 같은 인생에서 우리 앞에 놓인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느 길로 나아갈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삶의 내내 선택을 하는 우리는 어쩌면 죽음만이 출구인 미로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나는 파우스트에서 신이 말하는 이 문장을 “우리는 누구도 정답을 모르기에 방황한다. 그러나 누구도 정답을 모르기에 저마다의 정답을 꿈꿀 수 있다.”으로 바꾸어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이라는 자유를 무의미하게 볼 것인지 혹은 나의 길을 걸어가는 의미 있는 과정으로 볼 것인지는 저마다의 믿음에 기반한다. 그리고 파우스트가 구원받은 것도 바로 그가 메피스토를 만나기 전부터 죽는 순간까지 지녔던 세상에 대한 그 믿음에 근거한다. 그의 지향은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담겨있었으며, 메피스토를 통해 얻은 수많은 순간적인 쾌락은 결코, 파우스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믿음을 전복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파우스트의 말은 악마가 현혹하는 쾌락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느낀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걸쳐 사랑할 수 있을까.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화자는 모란이 피는 황홀한 짧은 날들과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슬픈 긴 날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탄생한 ‘황홀한 슬픔의 봄’처럼 모란이 지는 날들은 세상을 잃은 날이 아니라 봄이 다가오기 위해 필요한 계절임을, 봄은 짧지만 봄에 대한 마음은 영원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도 그러함을, 삶에서 기쁨과 쾌락은 순간적이나 그것을 없는, 그것을 바라는 순간은 훨씬 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쁜 모습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마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파우스트가 마지막에 떠올린 일상적 장면은 큰 의의가 있다.
정리하면, 나는 최진영 작가님의 “모든 구원은 스스로로부터”라는 말을 바탕으로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구원을 스스로에 의한 자의적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레트헨은 사랑 대신에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를 선택하며 구원을 얻었으며, 방황하던 파우스트도 그 방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구원했다. 이것은 파우스트가 괴테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과 괴테가 무신론자였다는 점에서 괜찮은 해석으로 여길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