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1. 작품 소개
이방인은 카뮈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인간상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작품이다. 현대인은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 자신을 잃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다. 현대인 고통은 그들이 자신을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이 가장 먼저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그러나 솔직한 인간은 가면과 위선이 가득한 현실세계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과연 이방인은 정말로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였을까? 카뮈의 이방인은 이 질문에 대해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다.
2. 줄거리
이방인은 1부와 2부로 구성이 되어 있다. 1부는 어느 날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찾아간 뫼르소가 담배를 피우고, 피곤에 지쳐 잠에 들고, 장례식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례식 다음날 뫼르소는 마리와 영화를 보고, 수영을 즐긴다. 그러나 마리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자신과 결혼하고 싶은지를 묻자 별 감흥 없이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결혼을 제안한다면 받아들일 것이라 말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해변가에서 자신과 함께 놀던 레이몽의 전 애인의 오빠를 보고 시비가 붙어 싸움을 벌이고 레이몽이 칼에 찔려 다치게 된다. 레이몽이 치료를 받고 얼마 뒤 다시 그들을 마주치는데 뫼르소는 태양의 열기가 너무 눈부셔서 그들 중 한 명에게 총을 한 발, 그리고 네발을 연이어 쏜다.
2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재판이 열리고, 재판 준비과정에서도 뫼르소는 그저 태양이 뜨거웠을 뿐이라 말하며, 재판에 큰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실제 재판에서는 살인 사건보다 그가 어머니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담배를 피우며 졸았다는 사실 등이 뫼르소의 사형 선고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뫼르소는 항소조차 포기한 채 사형 집행을 기다린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어느 날 그는 신부와 대화를 하게 된다. 신부는 그에게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회개할 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죽음만이 진실된 것이라 주장하며 신부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렇게 뫼르소는 사형 집행 당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증오해 주기를, 그리고 그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느끼고 죽기를 상상하며 작품은 끝이 난다.
3. 이방인 뫼르소에 대해
이 작품 내내 뫼르소는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속으로만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도 그러한 무관심을 드러낸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낄 뿐인 사람이다. 이러한 뫼르소의 모습은 하나의 솔직한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뫼르소를 둘러싼 세계는 그와 대비된다. 그의 변호사는 사형에 대해 뫼르소가 후회한다고 진술하면 무난하게 풀려날 것이라 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솔직하게 드러낸 점 때문에 그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 점이 작품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뫼르소가 자신의 진솔한 생각을 숨기고 거짓된 진술을 했다면 살인에 대해 거의 죗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지만, 오히려 솔직한 태도가 그를 사형으로 이끌었다는 점은 독자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뫼르소가 자신의 죽음만이 진실된다고 신부에게 말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열쇠를 찾을 수 있다. 뫼르소는 솔직한 인간이며 위선보다는 행위에 대한 책임을 택한 것이다. 이 행위는 신부를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진실되지 않은 속죄와 회개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뫼르소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위선을 죽음으로써 비판한다. 그리고 자신의 솔직한 행동을 증오하고, 비난할 대중들의 시선이야말로 어쩌면 그들의 가장 솔직한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으며, 그렇게 자신의 죽음의 순간이 이 위선적인 세계에서 이방인이던 자신이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4. 죽음에 대해
뫼르소가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며 대중들과 동질감을 느꼈을 또 다른 이유는 ‘살인’에 있다. 뫼르소는 단지 태양이 눈부셔서 아랍인을 죽였을 뿐이다. 그러한 살인에 대해 그는 어떠한 죄책감도 지니지 않는다. 살인에 무감각한 모습이다. 대중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의 재판에서 살인 행위 자체보다, 그의 과거 행동을 바탕으로 그를 평가하는 대중들은 살인 행위보다 이상적 인간상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뫼르소의 사형 집행 시간에 그를 증오하며 그의 죽음을 열광할 대중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살인에 대해 무감각한 인간상을 보여준다. 그렇게 뫼르소는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죽음에 무감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세계가 겉으로 드러내는 위선적 면모와 달리 내면은 자신과 동일하다는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5. 시지프 신화로 이어지는 부조리
솔직한 인간이라고 우리는 뫼르소를 긍정할 수 없다. 그는 엄연히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대중들을 우리가 긍정할 수 없다. 그들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겉으로 추구하지만, 실상은 뫼르소를 어머니에 대한 태도라는 이유로 살인했기 때문이다. 살인보다 태도의 죗값이 더 큰 사회에 대해 우리는 긍정할 수 있을까. 그렇게 모든 문학 작품이 그렇듯이 이 작품에도 완벽한 선인도, 완벽한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카뮈는 작중 인물에 대해 어떠한 긍정도,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나타난 솔직한 살인, 명목과 이유가 다른 살인에 대해서 시사점을 던짐을 통해 그들이 잊었던 무언가에 대해서 다시 기억하길 바라며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기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조리는 시작된다. 살인은 과연 정당화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살인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방인에 출발한 살인에 대한 사유가 ‘살인과 자살은 하나’라는 시지프 신화의 사유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