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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Apr 29. 2021

연분홍색 옷과 함께한 추억들

  한겨울의 깊이만큼 짙어진 녹색이 숲에 내려앉은 날이었다. 우리 부부는 숲길을 달리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워커힐 입구에서 더글라스 하우스로 이동했다. 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우리는 미뤄오던 혼인신고를 했다. 아이를 가지고 나서 혼인신고를 하고 싶었는데, 임신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혼 4주년에 우리는 아이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을 내려놓기로 했다. 우리는 숲 속 휴식을 콘셉트로 지어진 워커힐의 더글라스 하우스를 예약하고, 그곳에서 편안한 결혼기념일을 보내기로 했다. 당시 신랑도 나도 일에 치여서 매일을 보내고 주말도 회사에 반납하기 일쑤였다. 복잡한 대중교통, 회색 사무실만 보다가 숲길을 만나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경치로 유명한 피자힐에서 비싼 피자도 먹고, 한적한 숲길을 산책하기도 했다. 숲 속 오두막처럼 바닥과 벽이 모두 나무로 된 숙소에서는 결혼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핸드폰을 TV 앞에 세우고 카메라 어플에 타이머를 설정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날도 나는 연분홍색 모직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연분홍색 모직 블라우스는 그 해 겨울에 여의도 IFC몰에서 산 옷이었다. 루즈핏과 고급스러운 색감에 끌려서 만지작 거리고 있으니 신랑이 딱 내 옷이라면 구매를 추진했다. 넓은 터틀넥이 물결 흐르듯 목 주변을 감쌌고, 소매는 과하지 않은 퍼프 형태였다. 이 옷을 입으면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나는 이 옷이 좋았다.



  그 해 겨울에 영국에서 뮤지컬 ‘플래시 댄스’가 내한 왔다. 나는 뮤지컬을 관람하던 날에도 연분홍색 모직 블라우스를 입었다. 뮤지컬 관람 전에 신랑과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다가 코트를 벗어 팔에 걸쳤다. 연분홍색 옷을 더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아껴 입느라 몇 번 입지 못했다. 그해 봄과 함께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우리는 임신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는 2년 동안 연분홍색 옷은 옷장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아이 돌이 지난 봄날 초입부 어느 날이었다. 대학동창과 약속이 잡혔다. 나는 오랜만에 연분홍색 옷을 꺼내 입었다. 출산 후 변한 내 모습을 걱정하며 친구들을 만났는데, 친구들이 내게 출산 전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해줘서 내심 안심했다. 친구들을 만난 날 이후, 날은 점점 따뜻해졌고, 연분홍색 옷은 옷걸이에 붙박이처럼 걸려있었다. 찬바람이 누그러들면서 겨울 옷을 정리했고, 연분홍색 옷은 빨래통으로 들어갔다.



  4월의 어느 주말이었다. 베란다 앞 벚꽃나무의 연분홍색 꽃이 전날 온 비로 모두 떨어지고, 연두색 새싹만 잔꽃처럼 벚꽃나무에 붙어있었다. 나는 연분홍색 옷을 양손으로 집어 들었다. 따뜻했다. 거실에 쌓인 옷더미 위로 16개월 아이가 몸을 뒹굴었다. 건조기에서 막 꺼낸 옷의 온기가 좋았나 보다. 아이 몸짓에 따라 옷들이 거실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내 추억들도 같이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나지막이 신랑을 불렀다. 신랑은 건조기에서 옷을 모두 꺼낸 뒤 다가왔다.


  “이 옷은 건조기 돌리면 안 되는 건데….”


나는 쪼그라든 연분홍색 모직 블라우스를 손에 쥐고 말했다. 고급스럽고 보들보들했던 질감이 울퉁불퉁 거친 질감으로 변했다. 속상해서 목소리도 힘이 빠졌다. 신랑은 갸우뚱하다가 이내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댔다.


  “앗! 우리 와이프가 살이 많이 빠졌구나! 이렇게 작은 옷도 입다니!”


신랑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 나는 옷의 양어깨를 집어서 펼쳐 들었다. 옷이 작아졌다. 나는 이 옷을 내가 어떻게 입냐며 신랑을 질책했다. 아무리 살을 빼도 못 입을 사이즈였다.


  “아! 이거 우리 아이 옷인가? 맞네! 우리 아이 옷이네!”


신랑은 계속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옷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바닥에 두고 보니 거실에 뒹굴고 있는 아이 옷과 줄어든 옷의 크기가 비슷해 보였다. 신랑이 말이 갑자기 그럴싸하게 들렸다. 나는 좁히고 있던 미간을 슬며시 풀며 아이에게 연분홍색 옷을 대봤다.


  “그런가…?”


정말 아이 옷처럼 보여 나도 모르게 신랑 말에 동의하는 추임새를 내고 말았다. 우리 부부는 갑자기 의기투합해서 아이에게 연분홍색 옷을 입혔다. 남자아이라 그간 파란 계열 옷을 주로 입혔는데, 연분홍색도 잘 어울렸다. 옷은 아이 무릎 위를 살짝 덮었다. 소매 부분을 한 번씩 접어주고, 터틀넥 부분도 접어줬다. 아이는 옷을 입고 일어나서 몸을 양쪽으로 흔들었다. 옷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루즈핏에 터틀넥, 퍼프소매까지 남자아이 옷으로 본 적 없는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신랑이 갑자기 90년대 남자 아이돌 같다고 외쳤다.


  “젝스키스 커플! 장수원이네!”


신랑이 유튜브에서 젝스키스의 ‘커플’을 찾아서 보여줬다. 장수원이 등장하자 우리는 자지러졌다. 90년대 장수원 스타일을 우리 아이에게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꺼이꺼이 웃는 사이 노래는 후렴구를 향해 갔다.


  “호오~ ~  이제~”


신랑과 나는 후렴구를 함께 열창했다. 신랑이 옆에서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못 들은 채 하며 마음속으로 연분홍색 옷과 함께 했던 내 추억들을 애도했다. 그리고 연분홍색 옷을 입은 아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아이는 젝스키스의 장수원과 같은 차림새로 ‘커플’ 노래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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