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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색 형광펜 Jun 28. 2024

크리스천이 들은 뻔한 이야기, but 필요한 이야기

제10장 그러기에 묵묵하고 당당하게 그분과 걷기

2. 예수님을 따르기     


상황1. 한 겨울에 눈이 내린 길을 본 적이 있는나요? 만약, 허허벌판에 눈이 발목 이상 쌓였다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살얼음이 언 호수인지 알 수가 없을 때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까요?      

발자국이 있다면 일단 안심합니다. 누군가 먼저 갔고 그 흔적이 끊겨있지 않다면 그곳은 길이기 때문이죠. 발자국이 있다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저기가 길이구나.’라고요. 눈 위는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생깁니다. 또는 발자국을 보면 몇 명이 갔는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허허벌판의 눈 덮인 곳은 어느 곳이 길인지, 어느 곳이 얼어있는 물인지 알 수가 없지만 발자국이 있다면 거기가 길입니다. 갈 수 있는 곳이고요, 안전한 곳입니다.   

    

상황2. 산에서 길을 잃은 상황에서 목적지를 찾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적지와 방향을 확인합니다. 확인 후 확신이 들면 길을 개척해서 갈 수 있습니다.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방향을 찾을 수도 있죠. 밤이라면 북극성을 통해 북쪽을 확인하고 나머지 방향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시선은 바닥이 아니라 목적지입니다. 목적지가 확인되면 길이 험해도 갑니다. 장애물이 있다면 넘어서 가죠.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도착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황3. 깜깜한 밤에 길을 잃었다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까요?      

본래, 이번 꼭지의 길을 쓸 때 발자국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에 대해 주제와 키워드를 정해서 쓰려고 했는데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빛’입니다. 빛을 향해 가면 빛의 근원지를 만날 수 있어요.      


위의 상황 1, 2, 3 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길도 잘 알고 목적지를 잘 아는, 용기가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앞장서서 가고 나는 그 사람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앞장서서 가는 그의 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길을 떠나거나 여정을 떠날 때 의식하지 못하지만 안전하다고 인식되어야 그 길을 갑니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방향이 맞아야 발걸음을 옮깁니다. 누군가 앞장서서 간다면 그 누군가를 신뢰해야 따라갑니다. 그 누군가가 ‘이 길을 잘 안다.’, ‘목적지를 나보다 잘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나보다 용기있고 위험을 감수할 의지의 능력자다.’ 등의 이해와 동의가 되어야 따릅니다.      


저는 길 눈이 밝은 편이 아닙니다. 군대에서도 독도법이 서툴러 훈련 중에 지형정찰을 떠났다가 지휘본부에 뒤늦게 도착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작전장교가 ‘도대체 어디를 갔다왔냐’고 물으면서 혼을 냈는데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어디를 다녀온 지 알아야 대답을 할 수 있잖아요. 어디를 다녀온 지 모르는데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제가 독도법을 따로 연습하기 전까지 훈련 중 가장 신경썼던 부분은 앞에 가는 차, 중대, 첨병(행군의 맨 앞에서 경계, 수색하는 임무를 맡은 병사, 또는 그런 부대)을 잃지 않는 것이었어요. 이제는 시대가 좋아져 스마트폰으로 목적지를 설정하면 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지도의 화살표도 나옵니다. 자동차를 타면 내비게이션이 가는 법을 알려주죠. 하지만 진짜 심각한 길치는 지도가 있어도 무용지물이고 스마트폰이 있어도 잘 활용하지 못합니다. 길눈이 밝은 사람은 길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길치는 ‘공간지각력이 낮아 길 또는 방향을 찾는 능력이 떨어지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을 의미해요. 길치의 특징은 자신의 감에 의존하여 길을 간다는 점입니다. 눈앞에 문이 보일때 자신의 감에 좋은 느낌이 들면 그냥 그 문에 들어가거나 나갑니다. 지하철에서 출구의 번호나 환승의 위치를 확인하고 발걸음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지인은 지도나 약도는 외국어로 쓴 글처럼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환승해서 가면 세 정거장이면 갈 곳을 자신이 익숙하고 아는 길의 방법으로 열 정거장이 걸려 다니는 경우도 봤습니다. 길치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인지 아나요? 가까운 길이던지, 먼 길이던지 상관없이 우선 자신이 아는 지역과 접점 지역이 있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그 지점이 발견되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돌아서 가도 상관없어요. 우선 아는 지점과 지역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환승을 하거나 거쳐서 가거나 합니다. 이렇게 길눈이 어두운 사람이 길을 떠날 때 필요한 것은 차차 지도를 보거나 지형물을 기억하는 훈련이지만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죠. 아주 오래 걸립니다. 어렵습니다. 앞으로 차차 차근차근 한다면 지금 당장 여정을 떠나거나 장소를 찾아갈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길을 잘 아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양은 눈이 엄청 나쁩니다. 겁도 많은 동물이죠. 털도 자주 다듬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털의 무게에 눌려 거동도 못하게 됩니다. 혼자 힘으로 물이나 풀을 찾아 먹는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방향 감각도 거의 없어요. 넘어지면 혼자 일어서지 못합니다. 이동속도도 느리고 공격력, 방어력도 없습니다. 이런 동물인 양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목자’입니다.     


만약 지금 상황이 전투 중이고, 전쟁 중이라면 전술 능력이 뛰어나고 신뢰감을 주는 리더가 ‘나를 따르라’라고 하면 따라갑니다. 하지만 “네가 먼저 가봐 네가 앞장서서 가봐”라고 하는 리더가 있다면 지금 가볼 수는 있어도 후에 그 리더는 따르지 않습니다. 더 나은 리더상을 나요? ‘영화 300’을 보세요. 스스로를 ‘관대하다’고 말하는 크세르크세스가 부하들의 머리를 밟으며 등장합니다. 그리곤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승리를 위해 내 부하들을 죽일 수도 있다.” 반면에 레오니다스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죠. “나는 내 부하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라고요. 여러분은 어떤 리더를 따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결국 우리를 살리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국민일보 겨자씨에서 아래와 같은 문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파리를 따라가면 화장실로 가게 되고, 벌을 따라가면 꽃을 구경합니다. 도둑을 따라가면 담을 넘게 되고, 참스승을 따라가면 지혜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철학을 따라가면 물음표의 세계에 다다르고, 성경을 따라가면 진리의 세계에 이릅니다.”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야 할까요?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면 빛을 따라가야 합니다. 처한 곳이 환하다면 더 밝은 빛을 따르십시오. 즉, 빛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참된 빛을 따르세요. 말씀을 따르십시오. 주님을 따르세요. 예배를 따라야 합니다. 성령님을 따르십시오. 주님 가신 길을 따르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따르고 좁은 길을 따르십시오. 선한 길을 가시고 사랑을 베푸는 길을 따라가십시오. 목자를 따르고 진리를 따르십시오.     

자기 생각을 따라가면 겨우 자기 수준으로 살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면 하늘의 수준으로 살게 됩니다. 이방 여인 룻은 하나님을 선택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면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 사람 낚는 전도자가 됐습니다. 마귀를 따라가면 마귀가 가는 지옥에 가게 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4:19-     


우리는 주님만 따르면 됩니다. 주님만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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