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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보물

비자비 Since 1987

by 안노

나는 창동 거리를 사랑한다.

내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이 온전히 물든 이 거리를 나는 무척이나 사랑한다.


예전에는 몰랐다.

내가 무얼 사랑하는지 내가 무얼 미워하는지 그리고 내가 과연 무엇을 죽도록 증오하는지를.

삶의 깊은 구덩이를 첨벙첨벙 걷다, 어느 날 문득 기적처럼 다시 창동 거리를 걷고 있다.


내 어린 기억 속 창동은 아름답고 화려하고 분주하며 행복한 공간이었다.

그 기억 속 어느 모퉁이에는 고려당 통식빵을 든 젊은 아버지의 자상한 미소가 있었고,

수출자유무역 지구에서 손이 부르트게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던 외사촌 언니들의 눈동자에 비친 성탄절 트리와 구세군 냄비와 종소리에 어린 내 심장이 잔뜩 설렌 그 춥고 따뜻했던 겨울이 있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먹던 양배추 샌드위치,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화분 받침을 그릇 삼아 먹던 떡볶이, 눈으로만 먹던 무척이나 비쌌던 샛노란 바나나.


여고 시절 주말이면 할 일 없이 친구들과 배회하던 이 거리.


창동 네거리 중간에 멈춰 선 나는, 순간 울컥했다.


오래 전 그 시간, 이렇게 길을 잃고 엉거주춤 서 있노라면, 꼭 누군가를 만나곤 했었다. 저쪽 골목에서 두어 명, 이쪽 골목에서 두어 명 지나다 인사를 하기 일쑤였다. 학문당과 사라진 문화 문고 사이를 오가며 우린 그렇게 자라났다.


가난하고 힘든 이들이 모여 술 한잔 하던 양산박도, 첫사랑의 주머니에 꼭 든 내 손의 온기에 가슴 설레며 걸어갔던 그 시간들도, 이별에 눈물지으며 비자비 카페 2층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거리를 내다보던 내 이십 대도, 그 찬란하게 눈부셨던 순간들을 기억 속 보물 상자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본다.




여기 비자비에서 느긋한 주말 오후를 보내기도 했고 첫사랑과 재회하기도 했지.

좋은 친구들과 수다도 떨었고 기형도 시집을 단숨에 읽어 내렸으며 장정일 시집에 푹 빠져 해가 지는 줄도 몰랐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내 청춘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어.

그래, 그랬지.

치열했던 80년대와 막막했던 90년대가 이 거리 이 자리를 그렇게 스치고 지나갔던 거야!




옆 자리 중년 부부가 추억 소환을 하며 나누는 대화가 가만히 들린다.


- 이 옷 추워 보인다. 여보야, 내복을 입자.

- 우리 여기서 소개팅했잖아. 여보.

- 이거 바꾸러 갈까? 살이 너무 쪘어.

- 뭘 바꿔.

- 저녁은 어떡하지?

- 피자나 한 판 먹자. 애들도 집에 없는데.


나는 과연 인생의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걸까?


창동 거리 어느 모퉁이쯤에서 내 이십 대를 묻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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