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노 May 09. 2024

형식이

   아버지는 오늘도 늦다. 엄마랑 누나들은 텔레비전이 세상에서 젤 좋은 것 같다. 나는 아버지 카메라가 젤 좋은데. 방바닥에 누워서 눌어붙은 장판지를 손가락으로 후벼 팠다. 심심했다. 누나들과 엄마 웃음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그때 흔들리는 방울소리가 살짝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아빠다!”     


  한달음에 마루로 뛰어나갔다. 대문을 지그시 밀고 아버지가 들어섰다.      


  “아빠!”

  “아이고, 우리 새끼!”     


  나는 맨발로 막 달려 나갔다. 아버지는 한쪽에 카메라를 맨 채 다른 손에 커다란 종이 봉지를 안고 있었다. 나는 강아지처럼 코를 들이대며 킁킁댔다.     


  “빠나나 아이가?”

  “맞다!”

  “쉿!”     


  아버지와 나는 비밀 얘기를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마당을 걸어 들어갔다. 주인집 무당 할머니도 있고 뒤채 이 씨 네도 있었다. 나눠 먹기에는 식구가 너무 많았다.      


  “하이고! 이 귀한 거를 ….”     


  방바닥에 껌처럼 달라붙어 흑백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엄마와 누나들이 얼른 일어났다. 아버지 얼굴보다 샛노란 바나나를 더 뚫어져라 쳐다본다. 방 한가운데 황금덩이처럼 놓인 바나나 한 꾸러미. 눈이 부셨다. 아버지는 취했는지 하얀 피부가 벌그죽죽했다. 벽에 붙은 옷걸이에서 파자마를 꺼내 갈아입으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감히 만지지도 못하고 황금빛 바나나를 둘러싸고 앉아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바라, 뭐하노?”     


  아버지는 우리를 살짝 비집고 들어와서 노란 바나나 송이를 턱 들어 올리더니, 한 개를 탁- 비틀어 꺾었다.     

  “아!”     


  갑자기 탄성 같은 비명이 터졌다. 아버지는 그 큰 바나나 하나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어머니는 감동스러운 눈빛으로 받았다. 그다음은 큰 누나, 다음 작은 누나, 제일 마지막은 내 차례!


  아버지는 꼭 영웅 같았다. 누나들에게 바나나 한 송이씩 다 나눠주고 내게 건네면서 아버지가 내 궁둥이를 툭툭 쳤다.     


  “우리 행식이는 아부지꺼 꺼지 묵어라이!”     


  두 개를 건넸다. 그런 아버지 행동에 질투를 하거나 삐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나들은 손에 든 바나나만 쳐다보며 좋아했다. 

  바나나는 꼭 다섯 개였다.


  “안 된다. 우리 선생님이 콩 한쪽도 똑같이 묵어야 된다 캤다!”     


  아버지는 내 말에 감동을 한 표정이었다. 내가 얼른 바나나 한 개를 까서 아버지 입에 쑥- 집어넣었다.      


  “똑똑한 우리 아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날 밤에 나는 황금왕국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그 왕국에 임금님이 되었고 어머니는 멋진 왕비가 되었다. 누나들은 아름다운 공주였다. 나는 온통 황금으로 둘러싸인 행복한 왕자가 되었다.          


 

이전 07화 서영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