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퍼스널브랜드는 재창조될 수 있다.
‘부캐’란 본디 온라인 게임에서 쓰는 말이다. 원래 사용하던 계정이나 캐릭터를 ‘본캐(본래 캐릭터)’라고 한다면, 본캐 외에 새롭게 만든 부가적인 캐릭터를 줄여 ‘부캐’라 한다. 부캐를 만드는 이유는 본캐를 잘못 키웠거나, 새로운 캐릭터로 플레이하고 싶거나, 혹은 본캐로 플레이하기엔 남의 눈이 거슬려서다.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는 현대인들은 게이머와 같은 이유로 본캐와 부캐를 가지고 있다.
멋진 드럼 실력을 뽐내는 ‘유고스타’, 트로트 신인가수 ‘유산슬’, 라면 끓이는 요리사 ‘라섹’, 하프 신동 ‘유르페우스’, 라디오 DJ ‘유DJ뽕디스파뤼’, 치킨을 튀기는 ‘닭터유’, 그리고 여름 댄스 혼성 그룹 ‘싹3’의 멤버 ‘유두래곤’까지. 바로 국민 MC 유재석의 다양한 모습이다. ‘국민MC’가 본캐라면, 그 외의 다양한 모습들은 ‘부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상황에 맞춰 ‘가면(라틴어로 페르소나 persona)’을 바꿔 쓰듯,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을 ‘멀티 페르소나’라고 한다. 미디어 산업에 종사하는 연예인이나 셀럽은 ‘하나만 잘하면 되었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자신의 부캐 혹은 멀티 페르소나를 이용해 시청자들과 폭넓게 소통하고 있다. 소통은 시청률로 연결되고, 시청률은 곧 ‘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일반인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의 수많은 대화방과 SNS에서, 각각의 대화 상대에 맞는 소통을 위해 자신의 본모습과 다른 멀티 페르소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자신의 모습을 다양화하며 정신분열증에 빠지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는 SNS 등장 초기의 경고에도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다양화한다.
부캐나 멀티 페르소나를 통해 역동적이고 정열적으로 살아가며 돈도 버는 모습이 멋지고 부럽게 느껴져 따라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다양화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틀에 박힌 일상을 벗어나 일탈을 느끼고 싶은 마음과 불확실한 시대의 불안함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부가적으로 돈벌이까지 된다면 금상첨화다. 이러한 여러 이유를 종합해보면,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고 싶은 욕망이 부캐를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제품에는 일정한 수명이 있다. 일반적으로 도입기-성장기-성숙기-쇠퇴기의 단계를 거친다. 이러한 제품의 일생을 ‘제품수명주기(PLC: Product Life Cycle)’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 외부환경에 대응하여 변화하는 제품의 모습인 제품수명주기는 제품이 출시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판매량(sales) 혹은 시장점유율(market share)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즉, 제품수명주기는 시장에서 제품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는 중요한 이정표(guidepost)와 같은 것이다. 도입기에는 많은 투자를 통해 인지도를 형성하고 시장에 침투한다. 성장기에는 도입기의 투자로 인해 형성된 차별화와 인지도가 빛을 발하며 시장점유율이 높아진다. 성숙기에는 치열한 경쟁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프로모션을 하게 된다. 쇠퇴기에는 제품을 계속 끌어갈지, 시장에서 퇴출시킬지를 결정한다. 노화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제품에 수명이 있듯이, 인간의 수명에도 삶의 영향력에 따른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단편적으로 도식화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흐름의 유사성이다. 일반적으로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는 도입기와 성장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지금의 온라인 시대에는 쇠퇴기 또한 도입기 못지않게 중요하다. 롱테일 법칙(the Long Tail, 주목받지 못하는 다수가 핵심적인 소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현상)이 통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중장년층은 성숙기를 넘어 쇠퇴기로 가는 모습과 유사하며, 중요성이 커지는 것도 유사하다. 그리하여, 온라인 시대의 롱테일과 같이 소위 100세 인생에서 중장년 은퇴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황금기를 보낼 수도 있다. 이는 제품의 쇠퇴기에 브랜드 활력을 불어넣어 재강화하는 ‘재활성화(revitalization) 전략’이나 소비자의 인식 상에 다르게 자리매김하는 ‘리포지셔닝(repositioning) 전략’을 통해 제품을 다시 살리는 것과 같다.
지금 유행하는 부캐와 멀티 페르소나는 사실 브랜드 재활성화 혹은 리포지셔닝 전략과 다름 아니다. “나는 그렇게 복잡하게 살고 싶지 않아”, “난 이미 충분히 노후 준비가 되어 있어”라며 이러한 변화를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도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재도약이나 또 다른 시작과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부캐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과거에는 브랜드 정체성(identity)을 소비자의 머리와 마음 속에 고착화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대체로 예측할 수 있는 변화들 속에서 소비자의 요구도 복잡하지 않으니, 브랜드를 각인시키면 자연스레 매출로도 연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변화는 예측하기 어렵고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많이 변한다. 소비자의 요구도 극도로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브랜드는 유연성(flexibility)이 중요해졌다. 그러다보니, 퍼스널브랜드도 하나의 고착된 이미지 보다 다양한 부캐를 통해 풍부한 이미지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 것이다.
부캐에 대하여 고민할 때,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에서 임상실험을 통해 중년의 삶을 연구해 온 성인발달 연구의 대가인 윌리엄 새들러(William Sadler)의 연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남녀 50여 명을 12년간 꾸준히 추적 연구하여 인생을 네 시기로 나누고, 장수 혁명으로 새롭게 생겨나 생애 중간에 가장 긴 기간을 차지하는 40대에서 70대 중후반의 시기를 서드 에이지(third age)로 조명했다.
새들러는 마흔 이후 30년인 서드 에이지가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1차 성장과는 달리, 2차 성장을 통한 자아실현 추구 시기이며, 중년의 정체성 확립, 일과 여가 활동의 조화, 자신만의 자유와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조화롭게 함으로써 이 시기를 성공적으로 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중장년 은퇴기를 시장에서의 퇴출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재정비하는 기간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콘텐츠와 디지털 장비(주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로 일이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가 되길 추천한다. 이는 다양한 관계와 소통 속에서 자존감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다. 또한, “비교를 멈출 때 개성이 시작된다(Personality begins where comparison ends)”라고 말한 전설적인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처럼 남의 시선 상관 말고 자신의 행복에 집중하면 은퇴가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퍼스널브랜딩 강의나 코칭을 하다 보면 공통적인 질문이 있다. “브랜드는 유명한 제품에나 필요한 거 아닌가”, “평범한 사람에게 브랜딩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필자는 으레, “퍼스널브랜딩이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는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전달하고 그러한 소통 과정에서 행복과 자존감을 느끼고 싶다면 퍼스널브랜딩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서드 에이지를 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 퍼스널브랜딩을 시작한다면, 그 첫걸음으로 부캐를 만들어 보는 것은 좋은 도전이다. 다양한 부캐를 만들어 보는 시도는 인생의 정체성과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며, 단순한 취미생활이 돈벌이가 되는 가능성에 대한 투자가 될 것이며, 가족과 친구와 같은 가까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에 만날 수 없던 사람들과도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은퇴기 전후의 고민은, 햄릿 시대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라는 고민이 아니라, 지금! 100세 시대에는 “살긴 사는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더 절실하다. 결국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나의 (사회적)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 MC라 불리는 유재석이 끊임없이 부캐를 만들어 내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호훈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광고홍보학을 전공했다. 여론 분석 및 마케팅컨설팅 사업을 하며, 경영학과 겸임교수로, 소비자 문화·심리학 칼럼니스트로 및 채용 전문 면접관으로 활동 중이며, 퍼스널 브랜딩 강의와 코칭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N잡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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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IBK 기업은행 퇴직연금부 사보에 실린 글입니다.
주로 중장년층, 퇴직, 은퇴 전후 분들이 보시겠지요.
소위 시니어라고 하는 분들에게 강의를 하거나, 혹은 상담을 하다 보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이루어 놓으신 분들도 있고, 큰 부족함 없이 안정적으로 사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분들에겐 공통적인 고민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것입니다.
나란 누구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런지에 대한 고민이지요.
어찌 보면 사람은 평생 이러한 고민을 할지도 모릅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구요.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퍼스널 브랜드라는 테마 혹은 방법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많은 분들께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자존감을 높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비단, 시니어가 아니더라도 퍼스널 브랜드에 관심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