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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렌콩 Jul 18. 2018

탐험가의 첫무대이자 마지막 연극

첫희곡 "원수령"

  벌써 5년이 훌쩍 흐른 지금, 5년 전 내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을 바라보며 연극을 추억 해 본다. 문예창작학과는 졸업전 마지막 예술제에서 각 학생들의  창작 희곡 대본'으로 배우를 선정하여 연극을 꾸려야만 했다.


  여대의 반 아이들은 모두 가냘프고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를 가진 나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남성 역할인 주연 "탐험가"를 맡았다. 코미디와 정통희곡, 그때 진행했던 연극은 총 2개였다. 돌아가며 대본리딩을 하던 자리였고, 꽤 엄숙하면서도 진중한 대사가 남발하는 정통희곡의 배우를 맡는 부분에서 연출감독이 나를 콕 집었다. 더이상 물러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정통희곡의 남주연 '탐험가'를 연기해야만 했다.


  꽤 전문적이게도 혜화의 모 극단에서 연출&감독을 맡고 있는 현직자와 실제 배우분을 초빙하여 연기 수업과 발성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침묵적이고 수동적인 동작들을 상쇄시킬만한 발성이 내게는 너무도 부족했으며 그렇게 긴 대사를 외우는 것도 너무나 곤혹스러웠다. 아니 고통스러웠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소품팀이 열심히 준비한 의상을 입고, 긴머리를 말아 모자를 쓰고, 꽤 정교한 작은 총을 들며 긴 대사를 강하게 읊어야만 했다.


  내가 맡은 탐험가의 캐릭터는 모피를 사랑하고 허영심 많은 내 부인을 총으로 쏴 죽였으며, 우수리 숲에 살아가는 호랑이들을 숭배했다. 그리고, 숲 속에서 살아가는 '타냐'라는 아름다운 어린 소녀를 남몰래 흠모하며 사랑하는 역할이었다.


  위 연극의 희곡을 작성한 아이는 글을 참 잘썼다. 그 중에서도 섹슈얼리티한 내용들이 주를 이뤘다. 연극에선, 그런 단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그 대사들을 외우고 연기해야 했던 나는 더 자주 곤혹스러웠다. 때문에 알바나 약속, 지하철에서도 인쇄한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밑줄을 치고 또 치고, 달달달 외우고 또 외웠다.


  처음이자 마지막에 서보는 연극 무대인데, 대사를 틀리거나 연기를 망친다면 형편 없이 일을 그르친 내 자신이 미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생기지 못하도록 정말 열심히 했다.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하면서 느꼈던 것 하나는, 연극은 오로지 배우의 연기로만 구성되는 부류의 것이 아니었다. 연출과 음악팀의 적절한 타이밍과 조화로 연기의 흐름을 맞춰야 했고, 각 무대의 동선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연기를 하는 상대 배우의 감정까지도 조화롭게 맞춰야만 했다. 때문에 나는 내 부인 역할을 맡은 친구와 친해졌으며 더 화합하며 대사를 맞춰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본 무대에서 너무도 긴장한 나의 부인이 마지막 대사를 잊어버려 나조차 당황하여 몇초의 망설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말았다. (살짝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우리는 배우를 꿈꾸거나 배우를 희망하는 프로가 아니었으므로, 만족했다.)


  아무튼, 이렇게 오래된 사진 몇장까지 공개했으니 그 당시 대사로 읊었던 대본을 캡쳐본으로 살짝 공개해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보는 나의 연극은 그렇게 잘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혼내던 연출가님도 마지막에 다독여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다음날 시인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내 이름을 언급하며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외웠냐.'며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도리어 감사했었다.


  사실,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지만 그때 나는 연극이라는 예술을 한번 쯤은 경험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내 은밀한 속내가 현실반영으로 다져졌던 건지도.


  문예창작을 준비하면서 실기를 준비하기 위해 단편 소설만 썼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저것 다양한 글들을 썼다. 아니 쓰고 싶었다. 그래서 산문처럼 느껴지는 시도 써 보곤, 산문처럼 느껴지는 희곡도 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연극 무대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인 희곡,


하단에 공개하는 희곡을 작성했던 나이는 스무살이었다. 그때 짧게 지은 단편의 플롯을 재구성하여 10포인트 열 여덟장 분량으로 완성했었다. 그 중에서 몇 부분을 발췌하여 쑥쓰럽게 공개 해 본다.




원수령


-기획의도 -

연으로 맺어진 원수령이 존재한다?  


A가 기쁠때 B는 눈물을 흘린다.

반대로 B가 기쁠때 A는 눈물을 흘린다.


가슴팍에 이어진, 보이지 않는 녹색실로 연결된

이들은 생에서는 함께 웃을 순 없다.  


죽어서야 비로소 밝혀지는 원수령,


저승의 다음 단계 진입을 위하여 만나

서로의 희노애락을 공유하며 대화를 나눠야만 한다면?


동성애자 '한울'과 신인배우 '영지',

서로의 원수령이 전하는 그 속내는?

한울(저승 나이로 32세/ 죽은 나이는 28살/남자) 직업 : 회사원

영지(28세/여자) 직업 : 배우  


<무대> 바닥 부근에 잔잔한 빛 깔려있다. 가운데, 커다란 바위 덩그러니 놓여있다. 바위 뒤쪽에 일반 문보다 세 배나 큰 문이 있다. 주먹만 한 문손잡이가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검은색 양복을 쫙 빼 입은 남자 (한울)이 바위 가운데에 편하게 앉아있다. 한울의 손에 사전처럼 두껍고 큼직한 장부가 들려있다. 테두리가 금붙이로 번쩍이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며 손에 쥔 장부를 열심히 넘긴다. 그 바위 아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 (영지)가 긴 머리를 늘어트리며 옆으로 누워있다. 한울의 종이 넘기는 소리와 영지의 짧은 신음이 섞인다.


영지 : 으음.

한울 : (장부 소리 나게 닫으며) 드디어 일어났군.

영지 : 뭐야? (둘러보며) 여긴…어디야?  

한울 : (일어서며) 삶과 죽음의 중간이라고나 할까?  





*  






영지 : 우리 서로 맨 처음 봤을 때, 분명 너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영지 말 듣고 한울이 픽 웃는다. 곧 영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울이 말한다.

한울 : 남자 가슴?

영지 : 그래! (무릎 탁 치며) 남자 가슴!  

한울 : (대뜸) 난 평범한 남잔 아니야.

영지 : (설마하며) 혹시 너…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게이? 동성애자?

한울 : 맞아.  

영지 : 세상에! 니가? 정말?

한울 : 뭘 놀래.

영지 : 드라마나 영화, 책에서나 봤지. (신기하게 바라보며) 실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라서.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한울 : (짧게 한숨 내쉬며) 난 괴물도 아니고 좀비도 아니야. 평범한 남잔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은 맞아.

영지 : 그분들은 풍기는 분위기나 그런 게 많이 다를 줄 알았어.

한울 : 설령 느낌이라도 미세한 차이 정도지. 지극히 평범해.

영지 : 내가 알 턱이 있나. 내 주변엔 한 명도 없었다고.

한울 : 왜 없어. 너 소속사 막내 스텝, 박재안이던가? 걔랑 홍보팀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야.

영지 : (뜨악하며) 그걸 너가 어떻게 알아?

한울 : 그런 이유들을 이 저승에서 구구절절 설명하다간 입만 아프지.

영지 : 정말이야? 그 둘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긴 했지만….

한울 :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티 내지 않는 것 뿐. 아주 오래되고 진실한 커플이야. 내가 질투 날 정도로.

-영지 입 벌리며 허공 응시한다. 꽤 충격이 큰 듯, 벙 찐 표정이다.

한울 : 그렇다고 그들이 틀린 건 아니야. 남들과 조금 다를 뿐이지. 아니, 다를 것도 없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거. 그게 뭐가 이상해?

영지 : 너…(안쓰럽게 바라보며) 굉장히 힘들었겠구나.

-영지, 앞뒤로 흔들던 다리를 멈추고, 가만히 한울을 바라본다. 한울, 고개를 숙인다. 넓은 어깨가 둥글게 구부러진다. 한울의 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영지, 아무 말 못하고 고개 떨어트린다.

한울 : 아웃 팅 당했어.

영지 : (안타깝게) 어쩌다가….

한울 : 수업 끝마치고, 술을 마시게 됐는데, 그날따라 잔뜩 취했어.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 나를 택시에 태우려고 동기가 주소를 물었는데 난 이미 잠들어 있었어. 혹시나 주소가 있을까, 동기 녀석이 내 핸드폰 메모장을 뒤진 거야.

영지 : (조심스레) 메모장에 무슨 내용을 저장 했기에?

한울 : (제 손가락을 영지의 입에 갖다 대며) 쉿! 말 안 해도 알 것 같지 않아?  

영지 : (웃으며) 당연히 알 것 같긴 한데, 궁금하긴 하다.

한울 : (어깨 으쓱하며) 실은 나도 잘 몰라. 분명 술 먹고, 궁상맞게 일기 쓰듯이 적어 놓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긴 하는데…그 동기 녀석이 실수인지 고의인지 삭제 해 버렸으니까.

영지 : 그 동기가 메모 내용을 말해주며 물었을 거 아냐?

한울 : 그렇지도 않았어. 다음 날 아침부터 다짜고짜 찾아와선 남자 좋아하냐 묻더라고.

영지 : 그래서?

한울 : 침묵했어. 그러다가 그냥 고개만 끄덕였어. 내가 어젯밤 술김에 무슨 말을 하긴 했나보다 하고.

영지 : 바보야! 고개는 왜 주억거려? 끝까지 우겨야지.

한울 : 그 녀석 주둥이에서 신입이란 단어만 먼저 나왔다면 난 절대로 인정 안했어!

영지 : 신입은 누군데?

한울 : (망설이다) 내…사랑.

영지 : 너한테만?

한울 : 우린 서로 사랑했어. 너까지 우릴 모욕 하지 마.

영지 : (한숨 쉬며) 모욕 안 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한울 : 고개 끄덕이니까 이번에 새로 입학 한 그 신입이냐 묻더라고. 부정 하려 했는데 내 눈이 그러질 못했어.  

-한울의 두 눈이 빨개진다. 영지가 안타깝게 바라본다. 한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한다.

한울 :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 동기 녀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 버리더라고.  

영지 : …그래. 내가 기뻤을 때 넌 그렇게 슬펐구나.

한울 : 아니, 겨우 아웃 팅 당했다고 슬프진 않았어. 문제는 그 다음이야.

영지 : 다음?





*





영지 : (생긋 웃으며) 가발을 쓴 캐릭터 표현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한울 : (눈 크게 뜨며) 말도 안 돼. 고작 머리카락 때문에 캐스팅이 취소 됐다고?

영지 : 배역을 맡을 땐, 배우의 머리카락도 중요해. 키나 몸체만큼이나 캐릭터를 표현해 낼 수 있거든. 게다가 내가 맡은 배역은 스튜어디스가 꿈인 아주 여성스런 소녀였으니까.  

한울 : 하지만, 그 감독님이 가발을 쓰고 출연하라며 위로까지 했다면서?

영지 : 그래. 도중에 그 말까지 바꿔버린 변명 같은 이유지. 아무튼, 감독님 말마따나 가발을 쓰면 문제 될 건 별로 없었어. 나중에 알게 됐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소속사에서 홍보 비용을 보태는 대신 내 배역을 가로 챈 거였어.  

한울 : (안타깝게) 엄청 억울했겠네.

영지 : 그 당시 소속사도 없던 내가 무능력했던 거였고, 엄마에게 머리칼까지 잘렸고 그로인해 어이없는 꼬투리 잡힌 것도 모두 내 무능력 탓이었으니. 나도 솔직히 배우배우 거리면서 꿈 쫒았지만 확신은 없었거든. 엄마 말대로 지금 내가 이럴 상황인가 싶다가도 반대하니까 무작정 더 하고 싶고 그랬어. 머리칼을 잘리고, 배역까지 뺏긴 그 일주일. 난 죽어서도 배우가 되어야겠다. 비로소 돌덩이처럼 결심해버렸으니. 내겐 슬픔의 터닝 포인트였어.

한울 : 너와 나의 터닝 포인트 시기가 딱 맞아 떨어지네. 내가 기쁨의 터닝 포인트였으니 넌 슬픔의 터닝 포인트였겠지.

영지 : 숯처럼 까맣게 돋아난 머리칼을 거울로 보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머리카락 때문에 캐스팅이 취소 된 건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 스스로 더 약해지지 않으려 괜히 머리칼로 핑계를 돌렸던 것 같아. 이 머리칼이 딱 (자기 배꼽 가리키며) 여기까지 자랄 때까지 꼭 배우가 되자. 꼭 소속사에 들어가자. 작은 배역이라도 브라운관에 꼭 출연하자. 배꼽까지 머리칼을 기르기까지 5년. 내 다짐은 이루어졌어. 하지만 꿈을 이루고 나서도, 왜인지 머리칼에 집착하곤 했어.

한울 : (살며시 잡아당기며) 그래서 니가 지금 이렇게 머리가 치렁치렁 하구나.  




*




영지 : 꼭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어.

한울 : 뭐든 물어봐.

영지 : 어린 괴로움과 늙은 괴로움, 어떻게 생각해? 누가 더 괴로운 것 같아?

한울 : 그러니까 니 말인즉, 어렸을 때 괴로움과 늙었을 때 괴로움을 말 하는 거야?  

영지 : 맞아. 아이의 괴로움과 어른의 괴로움.

한울 : 글쎄. (잠시 생각하다가)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영지 : 난, 똑같아. 둘다.

한울 : 어째서?

영지 : 어렸을 때, 맨날 어른들이 말하곤 했어. 어린 게 괴롭긴 뭐가 괴롭냐며. 느이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봤어? 사회의 냉대를 느껴봤어? 혀를 끌끌 차며. 십대들의 엄살로밖에 안 보이나봐. 별 볼 일 없어 뵈지만, 고통도 슬픔도 그 본질 그대로인데. 난 그래서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웠어. 어른이 되어서 겪는 고통은 얼마나 아플까 하고.

한울 : 어른이 되니까 더 아프던?

영지 : (허탈하게 미소 지으며) 그때랑 똑같더라. 상처도 괴로움도, 하물며 학창시절 줄다리기 같은 친구 관계며 어른이 되어 일을 할 때, 하다 못 해 알바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얽히는 동료 관계 속 싸움이나 이간질은 여전했어. 그로부터 오는 고통도 전혀 다르지 않더라, 애나 어른이나.

한울 : (킥킥 웃으며) 애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지.

영지 : 우리 촬영장에서도 나이 버젓한 스텝 분들이며 감독님들끼리도 서로 왕따 시키고 이간질도 했어. 서로 받는 상처는 어른이라고 덜 받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튼, 어린 고통이나 늙은 고통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 왜 그걸 모를까? 자기들도 지나왔던 기억이고 길이었을 텐데. 어른이 되고나선 그걸 전부 까먹나 보지? 아니면 기억하기 싫은 걸까?




*





한울 : 우리는 비록 죽어서야 만난 원수령이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영지 : 그럼?

한울 : (씩 웃으며) 수호령. 수호령이라고 생각하려고.

영지 : 너무 모순 아니야? 수호령은 나를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잖아.

한울 : 수호령이 정말 나를 지켜줄까? 무작정 보호를 해 준다고 그게 고마운 걸까? 수호령만 믿고 제 멋대로 살다간 약해 빠져가지고 금방 죽어버리기 십상이겠다. 가끔 뒤통수도 갈겨주고 고통도 주고 스스로 강해지게 만들어야 진정한 수호령이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원수령은 (엄지손가락 치켜들며) 최고의 수호령이야.   

영지 : (웃으며) 그래. 너 말이 맞아. 삶과 죽음처럼 원수령도 어쩔 수 없는 존재였고, 극과 극의 불행과 행복. (사이) 자연처럼 불행이 오면 언젠가 행복이 올 테고, 행복이 오면 또 불행이 올 테니까.

한울 : (힘주어 또박또박) 전부, 마찬가지잖아.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울 말 마치고, 바닥에 놓인 장부를 조심스레 든다. 한울이 제 가슴팍에 이어진 녹색 실 사이로 장부 테두리를 아래로 향하게 잡은 채, 느릿하게 갖다 댄다. 그 순간, 금장 테두리가 환하게 반짝이고 절대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녹색 실이 부드럽게 끊어진다. 영지가 깜짝 놀란다. 한울이 실을 끊은 그 장부를 바위에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못내 아쉽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는 둘.  

한울 : 미우면서도 고마웠던 내 원수령아. 언젠가 또 볼 수 있겠지?

영지 : 연이 닿는다면. (생긋 미소 지으며) 이번에 환생하게 되면 죽어서 만나지 말고 꼭 살아서 만나자.

-한울과 영지 천천히 악수한다. 몸의 흔들림 때문에 가슴에 매달린 실이 달랑달랑 움직인다. 그 둘이 제 가슴에서 매달려 축 늘어져 있는 긴 녹색 실을 아니, 그들에게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그 실을 소중하게 매만진다. 한울이 조심스레 실 끝을 매듭짓고 영지도 그런 한울을 따라 실을 매듭짓는다. 한울이 영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바위 뒤, 거대한 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서 퇴장한다. 혼자 남겨진 영지가 바위를 한 바퀴 천천히 돌다가 장부를 소중하게 껴안는다. 어디선가 빠르게 책장 넘기는 소리와 바람소리 함께 들려오며 서서히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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