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쉼 없이 건네는 안부로만 희석된다.
자연의 순리는 자식이 부모를 먼저 떠나보내는 법이라지만, 운명이 뒤틀려 부모가 자식을 먼저 잃게 될 때 그 상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런 부모를 두고 ‘가슴에 자식을 묻는다’고 말한다. 무덤 속에 묻는다는 뜻이 아니다. 평생 흙으로 덮을 수 없는 상실을 가슴속에 품은 채 살아간다는 의미다. 『눈부신 안부』는 바로 그 지울 수 없는 통증에서 출발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몇 해 전 가족이 겪었던 비극이 떠올랐다. 먼 타지에서 조카를 잃은 고모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탐정을 수소문했고, 끝내 시신을 찾아 품에 안았다. 그 과정에서 울음조차 잃은 고모의 얼굴이 책 속 엄마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열세 살 해미는 길거리에서 일어난 대형 가스 폭발 사고로 언니 해리를 잃었다. 도시 전체가 흔들렸던 그날, 신문 1면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와 연기에 휩싸인 거리가 실렸다. 눈발처럼 흩날리던 파편 속에서 누군가는 깨어나지 못한 채 차가운 금속 아래 묻혔다. 언니가 없는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거실의 소파, 방문이 닫히며 울리던 소리, 함께 걷던 인도까지 모든 것이 언니의 부재로 깊게 패였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해미는 엄마를 울리지 않으려 애썼다. 사고 직후 울음을 꾹 삼키고, 엄마 앞에서는 일부러 웃었다. 그 얇은 웃음은 열세 살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생존자 죄책감’은 어린 해미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다. '내가 대신 사라졌다면 가족이 더 행복했을까.' 이런 질문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떠올랐다. 엄마의 울음을 방해할까 이불속에서 주먹을 쥐고 있던 해미, 엄마의 아픔만 헤아리느라, 자신의 상처는 끝내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한국에 남았고, 엄마와 해미, 막내 해나는 독일로 이주했다. 새로운 땅이라면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공항에 도착한 순간 알았다. 국경을 넘어도 언니의 빈자리는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비행기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은 언니의 숨결 같았고, 공항을 빠져나올 때 들이마신 독일의 차가운 공기는 언니의 마지막 온기를 앗아가는 듯했다.
* 이모라는 빛, 상실을 품은 세대의 연대
독일에서 해미 가족을 품어준 건 엄마의 언니, 행자 이모였다.
스물한 살에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건너와 평생을 간호사와 의사로 산 행자 이모는 상처와 상실에 익숙했다. 타국의 병원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매일 죽음을 마주했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늘 눈물과 타협을 요구했다. 이모의 어깨에는 수많은 죽음과 고향을 떠난 이들의 사연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모는 해미의 거짓말을 단숨에 알아챘다. 엄마를 안심시키려 만들어낸 상상 속 친구, ‘괜찮아’라는 말이 얼마나 흔들리는지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지만, 이모는 숨겨진 진짜 목소리를 꺼내주었다. 이모는 단순히 상처를 쓰다듬지 않았다.
해미가 스스로 그 상처를 직면할 수 있도록 곁에서 걸었다. 자전거를 타며 바람을 가르던 순간, 겨울밤 눈발 속을 함께 걸으며 잡아준 손길, 낯선 언어 속에서 첫 친구 레나를 만나도록 도와준 모든 순간이 해미를 서서히 다시 숨 쉬게 했다.
엄마가 품지 못한 상실을 이모가 대신 안아주었다. 엄마와 해미는 같은 상처를 가졌지만 서로에게 기대지 못했다. 상실은 혼자 감당하는 게 아니며, 아픔은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는 것을. 돌봄과 위로는 그렇게 혈연과 시간을 넘어 흘렀다.
조카를 찾아 품에 안은 후에도 무너져 있던 고모가 가족의 품에서 조금씩 회복되던 모습이 떠올랐다. 상처를 함께 바라봐 주는 것, 그 자체가 살아남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행자 이모와 함께하며 해미는 조금씩 다시 호흡을 찾았다.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았지만, 이모라는 빛이 해미의 어둠을 덜어주었다. 상처를 숨기지 않고 함께 바라봐 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열세 살의 해미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 거짓말로 봉인된 안부,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정
이모 덕분에 독일에서 숨을 고를 수 있었지만, 상실의 무게는 사라지지 않았다. 언니의 죽음은 열세 살 해미를 바꾸어 놓았다. 울음 대신 웃음을, 진심 대신 거짓말을 택했다. 엄마를 지키려던 거짓말이 어느 순간 해미 자신을 숨기는 방패가 되었다.
독일에서 만난 친구 레나와 한수는 해미가 처음으로 마음을 연 사람들이었다.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있었지만 외로움은 닮아 있었다. 그리고 한수의 엄마,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주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선자 이모는 파독 간호조무사로 독일에 와 두 자녀를 홀로 키웠다. 뇌종양 수술 후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았다. 한수는 엄마가 마지막으로 웃을 수 있도록, 젊은 시절 사랑했던 첫사랑을 찾아주고 싶었다. 이름조차 없이 이니셜로만 남은 그 사람을.
레나와 한수, 그리고 해미는 어설픈 탐정처럼 일기장을 뒤지고, 교회와 대학을 돌아다니며 추적을 시작했다. 해미는 한글 편지를 대신 써주며 누군가의 상처를 함께 짊어졌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해미는 거짓말을 이어갔다. 한수에게 ‘첫사랑을 찾았다’는 편지를 보내놓고도 두려움과 죄책감에 연락을 피했다. 선자 이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독일 친구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졌다.
해미는 모든 편지와 일기장을 상자에 넣고 봉인했다. 열세 살의 죄책감과 미완의 안부가 봉인된 상자였다.
세월이 흘러 기자가 된 해미는 바쁘게 살며 과거를 외면하려 했지만, 마음속에 얹힌 돌덩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제대로 묻지 못했던 안부가 그녀를 계속 붙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진전에서 대학 시절 인연이었던 우재를 만났다. 이 재회는 해미의 굳게 닫힌 시간을 흔들었다.
우재는 매일 연락했고, 그 소소한 대화 속에서 해미는 조금씩 말을 꺼냈다. 파독 간호사였던 이모들의 이야기, 독일 겨울의 냄새, 열세 살의 거짓말들. 기억은 봉인된 상자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다. 해미는 결국 상자를 열었다. 편지와 일기장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결심한다. 그때 하지 못했던 진짜 안부를, 이제라도 찾아서 전하기로.
20년이 넘게 지난 흔적을 쫓으며 해미는 어린 시절엔 보이지 않던 단서를 하나씩 발견한다. 기억을 다시 읽는다는 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었다. 성장한 해미가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고,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과정이었다. 봉인된 편지를 열고, 다시 쓰고, 잃어버린 안부를 찾아가는 그 여정은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 상처는 쉼 없이 건네는 안부로만 희석된다.
해미가 마침내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찾아냈을 때, 그건 단순히 한 사람의 옛사랑을 찾아낸 사건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해미의 영혼을 옥죄어왔던 거짓말을 바로잡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자신과 화해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첫사랑은 모두가 예상했던 남자가 아닌 여성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감히 말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선자 이모는 가족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했고, 결국 첫사랑을 떠나보낸 뒤 평생 ‘정상적인 사랑’의 가면을 쓰고 살아야 했다. 해미가 이번에 찾아낸 건 단순히 잃어버린 연인이 아니라, 세상이 끝내 인정해주지 않았던 선자 이모의 진짜 삶이었다.
열세 살 해미가 처음 거짓말을 택했을 때, 그것은 엄마의 눈물을 막기 위한 방패였다. 어린 동생을 지켜야 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느낀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방패에서 족쇄로 변했다. 묻히지 못한 안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해미를 찔렀다.
하지만 진짜 상처는 침묵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심리학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치유될 거라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면 상처는 더욱 깊이 뿌리내린다. 해미가 오랜 세월 안부를 묻지 않고 살아온 결과, 그녀의 삶은 늘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했고, 타인과 깊게 연결되지 못했다.
우재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으며 해미는 서서히 깨달았다. 상처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상처 입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괜찮아?’라는 단 한마디의 안부였다. 그 안부가 삶을 다시 이어주고,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던 자신을 다시 불러냈다.
상처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작은 안부 속에서 조금씩 옅어진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작은 안부들에 의해 조금씩 희석된다. 이모가 해미를 위로하며 이끌었듯, 파독 간호사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타국에서 버틸 수 있었듯, 해미가 결국 K.H.를 찾아 선자 이모의 미완의 사랑을 이어줬듯 말이다.
안부란 결국 ‘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가장 다정한 방식의 존재 증명이다. 그 증명이 쌓여야만 상처는 덜어지고, 침묵 속에 갇혀 있던 목소리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해미가 마침내 진짜 안부를 건넸을 때, 그것은 선자 이모뿐 아니라 독일에 두고 온 레나와 한수, 그리고 열세 살의 해미 자신에게도 보내는 안부였다.
*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부르는 빛, 나에게 보내는 눈부신 안부
해미가 K.H.를 찾아내어 편지 같은 일기들을 전했을 때, 그 일기는 단순히 한 사람의 옛사랑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수많은 안부가 한꺼번에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선자 이모의 사랑과 미완의 사연이 먼 하늘에서 빛을 받았고, 독일에서 끊긴 우정이 다시 이어졌으며, 무엇보다 열세 살에서 멈춰버린 해미의 시간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오래전 나의 기억을 마주쳤다. 몇 해 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면서 끝내 안부를 묻지 못한 날이 있었다. “괜찮냐”는 말 한마디조차 전하지 못한 채, 그 기억을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다. 책을 읽으며 그날의 공기가 되살아났고, 해미가 상자를 열 듯 나 역시 마음속 상자를 조금은 열 수 있었다.
책을 덮은 뒤, 나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먼 타지에서 아들을 잃은 뒤 탐정을 수소문해 끝내 품에 안았던 고모였다. 늦은 안부였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우리가 여전히 서로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정한 온기가 오래된 상처를 조용히 덮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상처는 망각으로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군가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만, 그때 멈춰버린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상처는 언제나 이름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상처받은 순간의 사람과 시간, 장소를 이름으로 기억한다. 그렇기에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부르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고통을 삶 속으로 다시 끌어와 의미를 바꾸는 행위다.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 때, 그 이름은 죽은 기억이 아니라 비로소 살아 있는 대화가 된다.
『눈부신 안부』를 읽으며 영화 「윤희에게」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북쪽 도시로 향하는 윤희. 편지를 건네며 눈발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해미와 겹쳐졌다. 누군가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는 건 우리가 아직 서로를 잃지 않았다는 증거다. 늦은 안부일지라도 그 다정함은 살아남은 영혼을 다시 뜨겁게 만든다.
해미의 여정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안부란 단순한 안부가 아니다. 그것은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다, 너는 잊히지 않았다’라는 가장 따뜻한 선언이다. 그 선언이 우리를 다시 삶으로 불러낸다. 상처는 잊음으로 치유되지 않는다. 상처는 부르고, 대답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반복 속에서만 조금씩 옅어진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한다. 늦은 안부라도 좋다. 그 다정함이야말로 우리를 다시 삶으로 불러내는 가장 확실한 빛이니까.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우리는 서로를 잃지 않았고,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