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장 너머로 엿본

by 가담



책을 읽든 글을 쓰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글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이점이 따라왔다.
첫째로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 것,
둘째로는 보는 눈이 생겼다는 거다.


민들레님과 연락을 주고받은 지
어느덧 1년이 조금 넘었다.
완벽한 타인이었던 우리가
수많은 말을 주고받기 시작한 건
순전히 글 덕분이었다.


물리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액정 너머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왔다.
어느 날은 날씨에 대해,
또 다른 하루는 각자가 보낸 하루에 대해,
그리고 가끔은 사적인 고민거리를 나누며
여러 말풍선으로 화면을 가득 채워나갔다.


'3월 초에 카페를 오픈할 거 같아요.'


평소와 별다를 게 없던 하루,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문장이 날라왔다.
확신에 가득 찬 마침표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초대장 비슷한 것이었으니.


누군가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일은 참 오묘하다.
한 번에 다섯 가지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오미자처럼,
기대와 걱정 그리고 설렘과 떨림 같은
높낮이가 각기 다른
여러 감정들이 휘몰아쳐 온다.


평소라면 의식하지 않았을 영역까지도
괜히 한 번씩 신경 쓰게 된다.
아무래도 웃는 표정이 좋겠지,
목소리가 좀 잠기지 않았나,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지.
생각 정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서울역에 도착해 버렸다.
한 시간이 이렇게 짧은 시간이었나.


'저 이제 지하철 내려서 걸어가고 있어요.'


카페에 도착하기 10분 전.
이 상황을 받아들인 건지
혹은 도를 넘게 긴장한 탓에
무뎌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집을 막 나섰을 때보다는
쿵쾅거리는 정도가 한결 잠잠해졌다.


영업을 알리는 입간판이 멀리서 보였다.
또박또박 적혀있는
'서계동 커피집'이라는 문구와
그 밑에 그려진 아기자기한 그림,
과연 민들레님 답다는 생각을 했다.


1층, 2층, 그리고 3층.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고,
그렇게 처음으로 민들레님과
화면 밖을 나와 서로를 마주 봤다.


새로운 만남일수록 바삐 움직인다.
서로의 눈빛과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을 살피고,
입에서 나오는 여러 단어와
문장을 곱씹어 본다.
그러다 보면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이런 사람이구나' 싶어진다.


카페 창가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이목을 끄는 건 단단한 커버로
둘러싸인 얄팍한 동화책.
내 자취 방에 쌓여있는
책 더미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르다.
좋아하고 아끼는 책이라는 말과 함께
민들레님은 책 두 권을 내 손에 쥐여줬다.
봄의 원피스와 수박 수영장이라,
과연 어떤 내용일까.


고소한 카페라떼와 쌉쌀 달콤한
녹차 테린느를 곁들어
한 장 한 장 곱씹으며 읽어 내렸다.
그리고 두 번째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 때쯤
자그마한 확신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따뜻한 사람이구나,라고.


창가에 책을 진열하는 사람과
거울 맡에 책을 쌓아두는 사람,
그리고 그 공간을 각기 다른 책으로
가득 채워나가는 서로 다른 사람.
책장 너머로 엿본 상대의 모습에 비로소
'이런 사람이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또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늘의 날씨에 대해,
그간 있었던 재미난 하루에 대해,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고민거리에 대해.


3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의자에 눌어붙었던 몸을
서서히 일으켜 세웠다.
다정한 시간이었던 만큼
돌아가는 발걸음이 찐득하게 늘어졌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문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향했던 길 못지않게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하다.
어떤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될지,
또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하니
앞으로도 글과 친하게 지내봐야겠다고.
그리고 다음에 놀러 가면
초코 테린느를 먹어봐야겠다는
달콤한 다짐으로 그날의 여운을 붙잡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