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프랭클린 다이어리' 열풍이 불었을 때 다이어리를 끼적이며 인생에 대한 플랜을 단기, 중장기로 나눠서 세웠던 적이 있었다. 어찌 보면 2009년, <학술적 글쓰기> 수업시간에 미래에 대한 이력서를 쓰면서까지도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패기가 넘쳤던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매일 일기를 쓰면서 뭔가를 끄적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인생에 계획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되는 대로' 살았던 것 같다. 백세인생 운운하는 시대에 나는 겨우 서른다섯에 불과하지만 인생을 아주 조금 살아보니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게 답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내 여행의 모토는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다. 사실 공부도 벼락치기가 제일 효과적이고 글쓰기도 마감기한이 있으면 더 잘 되지 않나. 이번 여행에서도 나의 '닥치는 대로' 기질은 과감 없이 발휘되었다. 출국 전에는 남편이 거의 다 조사하고 거시적인 계획을 세웠다면 하와이에 도착해서부터 핸드폰을 부여잡고 급한 불을 꺼야 한다는 심정으로 맛집을 조사했던 것 같다.
일단 내가 너무 배가 고파서 진짜 맛있는 걸 먹고 싶은 욕구도 컸다. 그렇게 Hertz에 가서 4륜 구동 Jeep 차를 빌린 우리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Tommy Bahama에 갔다. 숙소인 페어몬트 오키드와 가깝기도 했고 파스타가 맛있다는 블로그 평에 혹했던 나는 잔뜩 부푼 기대를 안고 식당에 들어갔다. 뭐가 맛있는지 사전조사를 열심히 했던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코코넛 쉬림프 6개, 해산물파스타, 마히마히 생선 스테이크, 다이어트 콜라 2잔 이렇게 시켰다. 사실 제로콜라를 몹시 마시고 싶었지만 미국에서는 제로콜라보다 다이어트 콜라가 대세였다. 다이어트콜라는 제로콜라보다 조금 달아서 내 입맛에는 별로였지만 어쩔 수 없이 '제로 콜라'를 얘기하면 점원들이 대부분 읭 하는 반응을 보여서 무조건 다이어트 콜라를 시켜야 했다. 일단 식전빵이 굉장히 독특한 터키빵처럼 생겨서 더욱 기대감에 부풀었다. 코코넛 쉬림프와 같이 나온 샐러드에 고수향이 났음에도 아삭한 식감이 좋아서 샐러드를 더 달라고 했다. 그다음으로 나온 파스타가 정말 대박이었다. 추후에 후기를 자세히 남길, 이번 여행의 베스트맛집 <Senia>의 라비올리와 쉬림프 파스타 다음으로 맛있었던 Tommy Bahama의 해산물파스타는 굉장히 오묘한 맛이었다. 내가 맛집 평론가는 아니라서 이 맛을 디테일하게 표현을 못하겠지만 '난생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사실 미국 본토 음식은 굉장히 짠 편이라고 기억하는데 하와이 음식은 대체적으로 짜지도 않았다. 그래도 꽤 최근에 미국을 다녀온 남편 역시 음식이 짜지 않다고 했다. 일단 파스타 면 자체가 아웃백 투움바 파스타랑 유사했고 새우들이 매우 도톰했으며 곁들여진 마늘빵마저도 맛있었다. 마히마히 생선스테이크와 같이 나왔던 갈릭라이스 역시 쫀득쫀득한 찰밥 같기도 한데 마늘 특유의 향이 느껴져서 좋았다. 요알못인 내가 남편한테 레시피 알아내서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을 정도면 말 다했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3개를 시키면 10만 원 안짝이지만 팁 18%가 더해지니 20만 원이라는 어마무시한 가격이 나왔다. 10만 원은 훌쩍 넘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겨우 메뉴 3개에 20만 원이 나오는 걸 보며 물가가 미쳤다는 걸 체감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수증 하단에 18%, 20%, 22% 이런 식으로 내 편의를 위해 팁 예시를 친절하게 주겠다는 식으로 적혀있는데 누가 당당히 no tip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10%만 드릴게요 할 수 있을까.
미국 내에서도 팁 문화에 대한 얘기가 심심찮게 들리는 거 보면 팁 문화가 막 좋다고는 볼 수 없을듯하다. 물론 미국이야 고용도 쉽고 해고가 쉬운 곳이니 팁 문화가 정착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방인 입장에서는 놀랄 노자 같다. 그래도 하나 부러웠던 건 그들이 일터에서 정말 즐겁게 일한다는 의외성이었다. 고용안정성이 상대적으로 잘 보장되는 일본이나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자유로운 분위기랄까. 미국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농담 잘하는 서버들이 정말 많았고 다들 너무 파이팅 넘치게 웃으면서 일하는 게 신기했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 오늘만 살자는 마인드로 살아서 그런 건가 싶기도 했다. 안정성을 너무 중시하는 내 입장에선 그들의 깃털 같은 자유분방함이 정말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자유분방한 사람도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권의 덜 자유분방한 사람의 발끝에도 못 미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물 두 모금 마셨는데 서버들이 즉각적으로 물을 채워주고 어떻냐고 물어보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맛있었기에 망정이지 맛이 없었으면 애써 웃음 지으며 억지로 괜찮다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출출했던 배를 채우고 난 후, 하와이 러버인 남편 친구가 추천해 준 호텔로 향했다. 빅아일랜드는 본섬 오하우보다 숙소가 적어서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사실 이번 여행이 신혼여행이었기에 가성비를 고려하지 않고 막 지를 수 있었다. 한국의 미래에셋 회장님이 인수한 곳이지만 생각보다 한국인은 거의 없는 곳이라 들었는데 실제로 서양인들이 많았다. 도착하자마자 내게는 꽃목걸이를 줬고 남편에게는 염주(?) 목걸이를 주는 게 너무 웃겼다. 남편은 호객하는 잡상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딱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아' 하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하와이 여행하는 내내 느꼈던 감정이지만 자본주의 끝판왕인 미국은 진짜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서비스의 '퀄리티'는 급상승하는 곳 같다. 이게 돈의 맛이라는 건가 싶은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정말 많았다. 웬만해선 사진을 잘 안 찍는 내가 바다가 바로 앞에 펼쳐지는 리셉션에서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으니 그때의 그 황홀함은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햇살이 막 비쳐오는데 바람은 살랑이고 푸른 바다가 내 눈앞에서 반짝이는데 여유로운 음악마저 흘러나오니 와, 천국인가 싶었다. 어매니티 역시 르 라보여서 향 덕후인 내 입장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르 라보 향으로 도배하니 행복해 죽을 지경이었다. 온수가 한국 온수만큼 뜨끈뜨끈하지 않아서 반신욕을 맘껏 못했던 게 아쉬웠지만 그것 빼곤 다 좋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베란다에 나가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일몰이 시작될 7시 무렵, 숙소 앞의 프라이빗 비치로 향했다. 일몰 마니아인 나는 이곳에서 인생 일몰을 보았다. 마우나케아 천문대에서 본 일몰이나 본섬 레스토랑 미쉘 엣 더 콜로니서프에서 본 일몰보다 백배나 좋았다. 사진과 영상도 많이 찍어놨지만 그때 눈에 담아두었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감정이 벅차오른달까. 인생 일몰을 봤다는 것만으로 하와이 여행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겨우 첫째 날인데 음식도 이렇게 좋고 일몰이 이렇게 아름다우면 어쩌자는 걸까 싶으면서 하와이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7시부터 선배드에 누워서 30분가량 철렁이는 바다 앞에서 그라데이션 되는 하늘을 바라보는데 없던 영감마저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 이래서 하와이 하와이 하는구나 싶으면서 앞으로 하와이가 내게 어떤 뜻깊은 선물을 선사할지가 궁금해졌다. 선선한 바람이 주는 여유로움과 포근한 햇살이 주는 안락함이랄까. 아 뭐랄까.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정말로.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말은 너무 과장된 말 같지만 그 정도로 황홀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번째 하루는 황홀경에 젖어 흘러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