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이너와 대표의 기로에 설 때마다
창업하고 1년쯤 지났을 무렵, 당시 유일했던 팀원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생각했다.
‘디자인 스튜디오에 비전이라는 게 있어야만 하나?’
‘디자인을 잘하는 게 우리의 비전이지’
이미 태어나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갓난아이에게
“그런데 너, 왜 태어났니?”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걸음마 배우느라 힘든 와중에 말이다.
크게 유념치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후 나는 틈만 나면 이 회사, 저 회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면서 ‘비전’이란 단어를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허공에 맴도는 미사여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뭐.. 다 똑같은 말 아닌가?
다시 태아 시절로 돌아가 본다.
내가 공채로 입사했던 회사는,
입사 시험 성적과 서류에 따라 부서가 배정되는 구조였다.
수석으로 입사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가장 성과가 좋던 현상설계 팀에 배정되었다. 서너 달에 한 번씩 설계 공모를 진행하는 팀이었고, 초년생인 내가 맡은 일은 주로 컨셉.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기보다는, 스토리와 아이디어, 개념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1인 회사나 중간 규모의 회사들도 많아졌지만, 라떼의 건축학도라면 누구나 졸업을 앞두고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체계와 규모로 움직이는 대형 펌 vs. 오너 디자이너의 철학으로 굴러가는 아틀리에.
나의 첫 회사는 전자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런 내가 회사 밖으로 나와 내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정답이 있는 객관식 시험에 익숙해져 있다가,
질문도 정답도 스스로 써야 하는 말 그대로 ‘자기 주도적인' 시험 체제로 들어선 셈이었다.
내가 창업한 후 맡게 되는 디자인은 더 이상 컨셉으로 시작해 컨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구상이 곧 현실이 되었고, 그림과 도면보단 사람과 예산이 촘촘히 얽힌 복잡한 과정이었다.
내 실력에는 나름의 자신이 있었지만, 그건 내가 속해 있던 리그에서나 통하는 얘기였다.
그리고 내가 차린 회사는 무려 ‘건설업’에 속하는,
그중에서도 순위권 저 멀리, 아주 작고도 작은 ‘점’ 같은 회사였다.
열심히 일에 몰두하며 지내다가도, 우연히 회사의 객관적 지표를 마주하게 될 때면 한없이 작아졌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채용하려 했다가도
과연 이 사람이 우리 회사에 올까 망설여졌고,
욕심나는 프로젝트를 목전에 두고도 주저하기를 반복했다.
디자이너로서의 나는 여전히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지만,
대표로서의 내가 될 때면 길을 잃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나는 비교하기 시작했다.
잡지에 등장하는 멋진 아틀리에들,
이미 자리 잡은 업계 선두의 회사들,
그리고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면, 신입 시절 야근하고 집에 가는 길, 팀 상사들과 회사 앞 포장마차에서 반주를 하고 귀가하던 날들이 새근새근 떠올랐다.
헤매고 있으면 다가와 가르쳐주고, 잘하면 칭찬해 주던 사수들, 언제라도 시시콜콜한 고민을 털어놓던 동기들이 그리웠다.
가장 힘들었던 건,
같은 방향을 보고 달려가는 동료들의 부재였다.
하지만 상실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우리의 작업을 알아봐 주는 클라이언트, 회사 운영을 응원해 주는 선후배들,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었을 때 느껴지는 작지만 분명한 성취감.
그 감정들이 다시금 나를 제자리로 데려다 놓았고,
내일도, 다음날도 나의 자리를 지켜내게 해 주었다.
그 지난한 과정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나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고집스런 작가도, 매출 그래프에 밝은 경영자도 아니었지만 우리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가치와 의미를 알아주는 사람들과 지속 가능한 관계 속에서 일하고 싶다는. 다소 천진한 꿈이 우리 회사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찾은 우리 회사의 비전이었다.
꼭 어느 쪽에 속하지 않더라도
나다운 회사, 나와 닮은 회사이면 충분했다.
그제서야 사업 멘토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신기하게도 내 마음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갈 무렵,
회사도 그만큼 자라 있었다.
얼마 전, 아들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아들이 침울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엄마는 내가 너무 귀엽다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잖아.”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우리 가족과 너의 친구들이 너를 귀엽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그 말을 해주며 문득 생각했다.
나도 어쩌면 모두에게 ‘괜찮은 회사’, ‘인정받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인정해줘야 할 내가,
그러지 못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전이라는 것은,
어디서 빌려올 수 있는 문장이 아니라
대표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것이었다.
디자이너가 좋은 디자인 컨셉을 찾으려면,
핀터레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곰곰이 들여다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