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 선 8억 명: AI 자동화의 진짜 병목

by 남창우

들어가며: 백지의 문제

Benedict Evans가 최근 a16z 팟캐스트에서 흥미로운 관찰을 공유했다(https://m.blog.naver.com/mynameisdj/224113700240). ChatGPT의 주간 활성 사용자는 8~9억명인데, 이 중 매일 사용하는 사람은 15%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머지 대다수는 계정도 있고, 뭔지도 알고, 사용법도 아는데, "이번 주에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은 백지(blank canvas)의 문제다. 무한한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빈 챗봇 화면 앞에서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모른다.

Evans는 또한 중요한 통찰을 던진다: "화면에 버튼이 7개만 있다면, 그건 선택지를 7개로 줄이기 위해 회사가 수년 동안 실험하고 학습한 지식이 들어간 결과다." 반대로 챗봇은 빈 화면에서 "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해"를 요구한다. 진짜 병목은 기술도 수요도 아니라, 워크플로우와 제품화 레이어라는 것이다.

이 관찰을 염두에 두고, 최근 스타트업 업계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풀어보려 한다. 우리는 각자의 현장에서 이 "백지의 문제"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었을까?


1. 자동화의 벽: 도메인 지식을 어떻게 AI에게 전달할 것인가

한 친구가 업무 스케줄링 자동화 도구를 만들면서 겪은 경험을 공유했다. 돌봄 서비스, 교육 기관, 의료 시설 등 다양한 곳에서 문의가 오는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AI로 뭔가 해보고 싶은데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복잡한 스케줄링은 단순히 시간을 배치하는 문제가 아니다. 각 산업과 조직마다 축적된 도메인 지식이 있고, 이것을 제약 조건으로 변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현재는 사람이 그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도메인 지식 → 사람의 해석 → 시스템 변수화 → 결과물"

문제는 이 사람의 해석 단계를 AI 에이전트로 대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세 가지 병목으로 구조화했다:

1)도메인 지식이 명시화되지 않는 암묵지로 존재한다

2)도메인 지식 자체가 계속 변한다

3)사람들이 AI 결과물을 신뢰하지 않는다

세 번째는 AI가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고, 두 번째는 에이전트의 자동 학습으로 해결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첫 번째, 암묵지의 명시화 가능성이 진짜 병목이다.


2. "느낌적인 느낌”: 업무의 암묵지

컨설팅 업무를 하는 다른 친구는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의 업무 산출물은 대부분 프레젠테이션 문서인데, 문제는 단순히 정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스타일'로 설득력 있게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AI한테 아무리 설명해도 우리가 원하는 수준으로 못 써. 프롬프트를 어떻게 짜든, 학습 데이터를 넣든 마찬가지야."

왜 그럴까? 명확한 스타일 가이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주관적으로 모아놓은 Best Practice' 뿐이다. 그는 자신의 딜레마를 이렇게 표현했다:

"좋은 사례 100개를 집어넣고, '이런 느낌적인 느낌대로 해줘'라고밖에 말을 못하겠어."

이것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과 닿아있다. 명확한 정의로 규정할 수 없지만, 사례들 사이의 유사성을 통해 암묵적으로 이해되는 것.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베스트 프랙티스 결과물만 보고 학습한 AI가, 그 결과물을 만든 인간의 지적 활동 자체를 모사할 수 있을까? 이것은 AI가 진짜 지능인가 하는 본질적 질문과 닿아있다.


3. 80%는 명시화 가능하다는 반론

여기서 흥미로운 반론이 나왔다. 한 친구는 암묵지의 대부분이 사실은 명시화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작업물은 프레임워크를 따라. 논문의 구조가 동일하듯이 업무도 보통 정해진 틀이 있어. 그냥 어떤 템플릿을 쓸지 안내가 부족할 뿐이야."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암묵지라고 부르는 것의 80%는 명시화할 수 있는 정보인데, 도출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있는 거 아닐까?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명문화하면, 그것이 다시 영향을 주면서 스타일 가이드가 점점 만들어지잖아."

이것은 Evans의 '백지 문제'와 비슷하다. 문제는 AI의 능력이 아니라, 사용자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 적절한 템플릿과 넛지만 제공되면 대부분의 업무가 자동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4. 매뉴얼과 현장 운영: 세상을 실제로 작동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반론을 폈다. 컨설턴트로서 제조업 공급망관리 디지털 전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낀 것은, 암묵지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매뉴얼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장을 작동시키는 것은 매뉴얼을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관련자들과 합의를 이루며 적용하는 적절한 운영이다. 생산 현장과 영업 부서에서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요구사항들, 예상치 못한 상황들, 미묘한 이해관계 조정들. 이런 것들이 자동화를 어렵게 만든다.

스케줄링도 마찬가지다. 규정은 맨날 바뀌고, 현장 상황은 계속 달라지고, 사람들은 갑자기 아프거나 휴가를 낸다. 동적인 현실이 정적인 시스템을 끊임없이 압도한다.

그래서 내 결론은 이렇다: 노동자의 상당수는 어느 정도의 지식노동을 하고 있다. 단순 반복 작업과 지식노동의 경계는, 바로 이 '시스템을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능력'에 있다.


5. 문서 자동화의 한계

프레젠테이션 자동 작성 도구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나왔다. 문서의 구성 자체가 이미 사업에 대한 구조화이고 설득 전략이다. 그것을 AI에 외주를 맡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한 친구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람이 최종 판단하는 것들, 판례와 사례로 베스트를 파악하는 것들은 암묵지로밖에 설명할 수 없어. 무한에 가까운 파라미터를 모두 학습하고 뱉어낼 수 있다면 당연히 AI로도 가능하겠지만, 내 인지 능력으로는 상상이 안 가."

이것이 현장의 솔직한 목소리다. 우리는 AI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어떻게 그것이 구현될지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한다.


6. 지식노동의 양극화

대화는 자연스럽게 더 본질적인 질문으로 흘러갔다. AI가 발전하면 지식노동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한 친구가 농담조로 말했다: "배관공이나 전기 기사 하면 부자 될 것 같은데.”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지한 관찰이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무직이 자동화되면 물리적 노동의 상대적 가치가 올라간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본다. 지식 노동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양극화는 진행될 것이다:

- 시스템을 설계하고 수정하는 소수의 고급 인력

- AI가 아직 대체하지 못하는 물리적 실행과 대면 설득을 담당하는 다수

문제는 그 중간 지대가 얼마나 넓게 남아있을 것인가다.


결론: 워크플로우 레이어에 혁신의 기회가 있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합의한 것은 명확하다. AI 기술 자체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현재 상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AI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진짜 병목은 워크플로우와 제품화 레이어다.

Evans가 포착한 "8억 사용자의 역설"은 우리의 현장 경험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기회가 있다. 누군가는 암묵지를 명시화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는 워크플로우에 AI를 완벽히 녹이는 제품을 만들 것이다. 누군가는 백지를 채우는 적절한 넛지를 설계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은, 어느 순간 올바른 기회를 알아보게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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