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현대 미술에 길을 묻다

서양미술사에서 발견한, 혁신을 바라보는 4가지 관점들

by 남창우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쓴 『서양미술사』의 현대미술 파트(27장)를 읽고 토론했다. 예술가들의 고민이 오늘날 스타트업의 딜레마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기능과 아름다움, 인습과 혁신, 모방과 창조, 재료와 본질. 현대 미술가들의 치열한 실험 속에서 우리는 스타트업의 '길'에 대한 힌트들을 얻을 수 있었다.


1. MVP의 함정: 기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바우하우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토로 시작된 디자인 혁명. 장식을 배제하고 오직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을 추구했다. 하지만 곰브리치는 냉정하게 지적한다. 기능만으로는 걸작이 탄생하지 않는다고. 기능과 미학의 조화를 찾는 장인의 '취향과 기술'이 핵심이라고.


이는 '최소 기능 제품(Minimum Viable Product)'이 만연한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기능은 작동하지만, 완성도가 무척 아쉬운 제품들이 넘쳐난다. 시장이 성숙해지면서 유저들이 기대하는 '최소'의 기준은 이미 너무나 높아졌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건 MVP가 아니라 의미 있는 제품, Meaningful Viable Product다.


디자인은 포지셔닝이다

배달의민족이 초기에 '주아체' 개발에 수억 원을 투자한 이유는 그저 예쁜 폰트가 필요해서만은 아니었다. 단체 주문을 담당하는 20대 막내 사원들에게 '친근하고 재미있는 동네 형'이라는 명확한 포지셔닝을 통해 다가서기 위한 것이었다.


토스가 간편 송금 앱을 넘어 금융 슈퍼앱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버튼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된다"는 핵심 가치를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느끼게 만든 집요한 UX 설계가 있었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다.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줄 것인지 정의하고, 그 가치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 그 자체다.


2. 인습의 발견: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인상주의자들의 깨달음: 인간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지식과 문화라는 인습(convention)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개발 방법론에서 말하는 자연스러운 아키텍처, 시장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비즈니스 모델. 이 모든 것들 역시 특정 시대와 맥락에서 형성된 인습일 수 있다. 혁신은 이 관찰 프레임을 깨뜨릴 때 일어난다. 우버가 택시업을, 에어비앤비가 숙박업을 재정의했듯이.


우리는 '월 정액 구독 모델'이라는 인습적 수익 모델에 의문을 던졌다.


모델은 시장이 결정한다

사용량 기반 과금(Vercel), 매출 연동 수수료(Stripe) 등 대안은 이미 존재한다. 월 구독이 주류가 된 이유는 기술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었다. 고객의 매출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한 문화적 거부감, 사용량 측정의 복잡함, 예측 가능한 수익에 대한 투자자의 선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혁신은 추상화의 역사다

소유 경제에서 구독 경제로의 전환은 중요한 혁신이었다. 공유 킥보드와 같은 구독 서비스는 임대되는 장치의 감가상각 비용 같은 복잡한 문제를 공급자가 떠안는 대신 사용자는 더 높은 추상화 계층의 가치를 손쉽게 누리게 됐다. 이 추상화 계층을 누가 더 잘 설계하느냐가 다음 혁신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3. 제로 투 원의 신화: 창조는 조합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에 등장하는 초현실적 풍경과 괴물들. 사람들은 그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보스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아니었다. 지옥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평생 몰두하며, 기존의 종교화 문법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결과였다. 수백 번의 스케치와 습작을 거친 치밀한 실험이었다.


"X 분야의 우버" 같은 제한적인 혁신과 "AI를 위한 AI" 같은 혁신을 위한 혁신 사이에서 스타트업들은 고뇌한다. 제로 투 원(Zero to One), 즉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가 많은 창업가를 짓누른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 보면, 제로 투 원은 성공 이후에 붙여지는 서사에 가깝다.


구글도 페이스북도 1 to 1.5였다

구글이 등장했을 때 검색엔진은 이미 존재했다. 페이스북 이전에도 마이스페이스가 있었다. 그들이 한 일은 아무도 풀지 않은 문제를 푼 게 아니라, 모두가 겪는 보편적 문제를 압도적으로 더 나은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아이폰을 구성하는 터치스크린, 모바일 인터넷, 앱스토어는 모두 이전에 존재하던 기술이었다. 애플은 이들을 탁월하게 결합하여 개별적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가치를 창출했고, 사용자 개개인에게는 제로 투 원과 같은 혁신적 경험을 선사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지금 해결하려는 문제 자체에 깊이 몰입하는 것. 그것이 진짜 혁신으로 가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라고 생각한다.


4. 새로운 재료와 별의 순간

현대 미술가들의 실험: 물감이라는 전통 매체를 넘어 진흙, 톱밥, 금속을 사용하며 표현의 한계를 넓혔다. 표현의 한계가 곧 사고의 한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AI, 블록체인, 공간 컴퓨팅 같은 신기술은 스타트업에게 주어진 새로운 재료다. 하지만 새로운 재료로 포장만 바꾼 것과 본질적 혁신을 이룬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탑다운과 바텀업이 만나는 지점

- 탑다운 혁신: 자본과 권력이 특정 분야(반도체, AI)에 자원을 집중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혁신

- 바텀업 혁신: 개인이나 작은 팀이 순수한 열정으로 한 우물을 파다가, 시대적 필요와 만나 빛을 보는 혁신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1993년 창업 당시 AI 붐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병렬 연산이라는 하나의 문제에 계속 몰두했을 뿐이다. 게임 그래픽 카드 회사로 알려졌던 엔비디아가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 기업이 된 것은, 바텀업으로 축적된 전문성이 탑다운의 시대적 요구와 만났기 때문이다.


별의 순간은 이 두 흐름이 만날 때 찾아온다.


결론: 자신의 '놀이'를 찾자

"길을 찾지 마세요. 그냥 하던 일을 계속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다 성공하면 다른 사람들이 길이라고 부르는 법이니까요." - 드라마 <대행사> 중에서 -

불확실한 시대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혁신 전략은 트렌드를 좇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놀이를 찾아 깊이 몰입하는 것이다. 그것이 코딩이든, 디자인이든, 특정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든. 순수한 재미와 열정으로 파고들다 보면 어느새 자신만의 재료를 가장 잘 다루는 장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세상이 그 재료를 필요로 하는 별의 순간이 찾아올 때, 놀이는 세상의 혁신이 되어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커리어 슈퍼 사이클의 진화: 관료에서 창업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