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일치, 글쓰기, 전통, 그리고 ‘정상’의 역사성
회사에서 KPI로 싸울 때도, 법정에서 상식이 근거가 될 때도, 연인 사이에서 “그건 당연하지”라는 말이 오갈 때도, 우리는 늘 어떤 보이지 않는 기준 위에 서 있다. 문제는 그 기준이 정말 객관적인지, 아니면 다수가 오래 유지해온 습관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면 '누가 맞나'로 달려가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부르는 규칙은 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이데거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후설은 객관성과 ‘정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과 세대를 통해 형성되고 계속 교정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 글은 그 관점에서 불일치, 글쓰기, 전통을 따라가며 객관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본다.
1. 불일치는 학문의 연료다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세계를 대체로 비슷하게 본다는 가정이 깨지는 순간이 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끼리도 '무엇이 사실인가'를 두고 충돌할 때다. 이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굳이 모두에게 통하는 답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일치가 발생하면 두 가지가 동시에 열린다.
세계는 한 각도에서만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은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묻는다. “그래도 우리 모두에게 통하는 기준은 없나?”
후설에게 학문적 객관성은 이 질문이 굳어져 만들어진 프로젝트다. 핵심은 단순하다. 객관성은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합의되지 못한 상황에서 솟아오른 목표다.
2. 객관성을 가능하게 만든 기술: 글쓰기
불일치가 객관성의 동기를 만든다면, 그 객관성을 실제로 쌓아 올리게 한 도구는 무엇일까. 후설은 글쓰기를 중요한 지점에 놓는다.
말은 그때 그 자리의 사람·관계·분위기와 강하게 엮인다. 반면 글은 기록되는 순간, 의미가 특정한 상황의 지시 맥락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나와 다른 사람,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다시 검토 가능한 형태를 얻는다. 또한 글은 후대에게 전달되어, 여러 세대의 연구자들이 이용하고 덧붙이며 키워가는 지식의 저수지(집단적 기억)가 된다. 복잡한 이론이 수백 년에 걸쳐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글의 힘이 큰 만큼, 글에는 위험도 붙어 있다.
3. 글쓰기의 두 가지 위험: 말의 유혹과 객관주의
첫 번째 위험은 언어의 유혹이다. 글로 굳어진 개념과 문장들은 그럴듯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대상을 겨냥해 확인하고 책임 있게 판단하기보다, 전수된 가정과 해석 틀을 손쉽게 빌려 쓰게 된다. 생각이 편해지는 대신, 사유가 무뎌진다.
두 번째 위험은 객관주의다. 이념(개념/이론)이 널리 통용될수록, 그것이 원래는 어떤 경험과 문제의식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잊히기 쉽다. 구성(만들어냄)의 흔적이 지워지고, 남는 것은 '이미 있는 진리'처럼 보이는 껍데기다. 후설이 말한 학문의 위기는 이런 망각과 연관된다. 학문이 생활세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 객관성은 지식이 아니라 권위가 된다.
4. 진리는 하나뿐인가: '시장의 진리'의 비유
여기서 후설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습관을 흔든다. 우리는 종종 "진리는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후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시장 상인은 시장의 진리를 갖는다. “오늘 이 가격이 적정하다”, “이 손님에게는 여기까지 양보하는 게 최선이다.” 이 진리는 시장이라는 맥락 안에서는 충분히 훌륭하고 유용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짜 진리인가? 학자가 더 정밀한 과학의 기준으로 다른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서, 시장 진리는 허구가 되는가?
후설이 여기서 밀어붙이는 요지는, 진리에는 서로 다른 목표와 실천에 맞는 여러 타당한 양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학문적 진리가 강력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강력함이 곧 유일한 절대 규범을 뜻하지는 않는다. 특히 철학과 논리학에서 정밀 과학의 존재 자체가 절대 규범인 듯 믿는 태도는 경계되어야 한다. 학문의 이상은 중요한 지향점이지만, 모든 삶의 층위를 재단하는 잣대가 되는 순간, 그것은 객관성이라기보다 현혹에 가까워진다.
5. 내가 ‘정상’이라 부르는 것은 어디서 왔나: 전통과 세대성
여기까지 오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후설은 정상성(정상/비정상)이라는 개념을 개인의 심리나 통계적 평균으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성은 전통에 매여 있는 규범들의 묶음이며, 세대를 통해 설립되고 강화되는 역사적 구조라고 본다.
나는 '내가 만든 나'만으로 살지 않는다. 나는 시대의 아이이고, 이미 존재해온 공동체의 상속자로서 세계를 본다. 내가 자연스럽게 여기는 고향세계—언어, 관습, 예의, 상식, 현실감—는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세대적 전수의 산물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삶은 역사적 공동체 속에서 성립한다. 이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조차, 그냥 거기 있는 바위 같은 것이 아니라 공유된 정상성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6. 객관성은 도착점이 아니라, 끝없는 교정이다
그렇다면 객관성은 무엇인가. 후설의 대답은 다소 불편하지만 강력하다.
객관성은 이미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관점을 맞대고 조정하며 만들어가는 역사적 과정이다.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조차, 처음부터 확정된 것이 아니라 상호 간에 가정되고 검증되는 지위를 가진다.
절대적 진리는 “어딘가에 도달하면 끝나는 결론”이라기보다, 열린 공동체가 계속 반박하고 수정하며 가까워지는 지향점에 가깝다. 실제의 합의는 언제나 더 나은 근거에 의해 교정될 수 있으니, 합의는 닫히지 않는다. 진리는 도달이 아니라 끝없는 교정이다.
그래서 후설의 결론은 이런 형태를 띤다. 고여 있는 세계는 없다. 세계는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대비 속에서만 주어진다. 세계의 안정성은 겉보기에는 단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동의 정상성이 흔들리면 원리적으로 무너질 수도 있는 구조다. 그리고 나는 처음부터 타자들이 이미 의미를 공급해놓은 세계 속에서 산다. 나의 사고는 언제나 전통과 언어에 의해 어느 정도 이미 짜여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무력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임은 더 커진다. 객관성이란 완결된 답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지속해야 하는 교정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깨달으면서 더 진리에 가까워진다. 이것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겸손하라는 윤리적 요청이기도 하다.
정리
이 일련의 논의가 한 덩어리로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롭다.
불일치가 객관성 탐구의 동기를 만든다.
글쓰기는 객관성을 축적하게 하지만, 동시에 언어의 유혹과 객관주의라는 위험을 만든다.
진리에는 여러 타당한 양식이 있을 수 있으며, 과학적 이상을 절대 규범으로 착각하면 철학은 빈 껍데기가 된다.
우리가 “정상”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전통과 세대성이 만든 역사적 규범이다.
객관성은 완결이 아니라 열린 공동체의 끝없는 교정이며, 세계의 안정성은 그 과정 위에서만 성립한다.
마치며
이제 질문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 중에서, 정말 내가 확인해본 것은 얼마나 될까. 반대로, 내가 '객관적'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에서, 사실은 특정 전통이 내게 상속한 규범에 불과한 것은 얼마나 될까. 상속받은 세계를 그대로 반복할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손질해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지는 결국 현재를 사는 나의 몫이다.
출처
후설의 현상학(단 자하비)을 읽고 나름대로 정리하여 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