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좋아하는 개발자 친구와 함께 철학과 사회,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체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추상적인 철학 담론과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오가며 진행됐다.
커뮤니티 운영에서 발견한 다원성
최근 나는 '파운더스 페이지'라는 (1인) 창업가와 크리에이터들의 회고 모임을 만들었다. 북클럽도 계속 운영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사람들을 한 공간에 모으는 과정에서 세계가 얼마나 다원적인지 실감하게 됐다.
누구는 대학 커뮤니티 홍보 글을 보고
누구는 인스타그램 광고를 통해
누구는 근처 카페에 붙인 포스터를 보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의 구성은 무척 다양해서, 전혀 다른 세계관에 살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sns와 유튜브 때문에 세상이 다원화됐다고들 하는데,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세상은 원래 다원적이었고 기술이 그것을 드러냈을 뿐 아닐까? 부족에서 국가 단위로 규모가 확장되던 시절에도 상인들은 이미 이 다원성을 경험했을 것이다.
공동체를 묶는 장치들의 진화
흥미로운 건 모든 시대마다 이 다원성을 통합하는 나름의 장치가 있었다는 점이다:
고대 부족 시대: 부족 신화와 혈연
중세: 종교적 공동체
제국 시대: 칭기즈칸의 '큰 하늘(텡그리)' 개념
근대: 계몽주의, 특히 칸트의 보편 이성 및 인간의 존엄성 주장
현대: 인권과 보편적 가치
칭기즈칸의 사례가 특히 흥미롭다. 그는 몽골 초원의 서로 다른 신을 믿는 부족들을 통합하기 위해 '큰 하늘' 아래 모두가 형제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도 아래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복지를 제공하고, 과부와 고아를 보호하고, 심지어 동물 복지까지 실현했다. 전쟁에서 오래 뛴 말은 은퇴시켜 쉬게 했다.
하지만 자신과 관계없는 적대 부족에게는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당시의 '도덕'이었고, 우리는 여기서 멀어져 가고 있다.
성립이 불가능한 가치들
역사와 다른 문화를 관찰하면 각자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 하지만 살인과 거짓말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는 지속 불가능하다. 조직 내부에서 살인하고 거짓말하면 신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런 성립이 불가능한 가치들을 제외하면, 도덕적 가치나 문화적 규범은 상당히 자의적이다. 필연적인 것이 없고, 여러 요소를 조합해서 합리적이라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회에는 선과 악의 개념이 있고, 미덕도 있다. 특수한 것도 있지만 보편적인 것도 분명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의 검증
극단적인 문화는 한 시대에는 작동할지언정, 장기적으로 봤을 때 도태된다. 히틀러의 나치 체제나 아즈텍 문명처럼, 적대 민족을 공격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는 체제는 장기 지속이 불가능하다. 적대 민족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도 비슷했다. 노예가 계속 필요한 경제 체제였다가 노예 공급이 끊기자 기독교를 수용하며 체제를 바꿨다.
시장 경제에 내재한 혁신
시장경제가 집단을 단일한 가치관으로 묶어 질서를 유지하는 체제보다 혁신적이었던 점은, 서로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시장 거래를 통해 서로의 복지를 향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가 믿는 종교를 믿지 않고, 상대의 가치관에 완전히 반대하더라도, 서로 상거래를 할 수 있고 같이 경제 활동을 하며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시장경제 자체에 자유주의와 가치 다원주의가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 나라 사람들과도 시장 거래를 할 수 있고 세계화가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자유 무역에 대한 러스트벨트의 반격
반대로 미국 러스트벨트(Rust Belt) 노동자들 입장을 생각해 보자:
"나는 열심히 일했다. 군대도 갔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하게 살았다. 그렇게 미국이 번영하는 데 기여했는데, 제조업이 아시아로 이동해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그런데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외국인들과 친한 '이상한 애들'이 동성애, 트랜스젠더를 옹호하고 우릴 미개하다고 한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심정은 이해가 된다. 자유무역을 통해 얻은 부를 재분배하는 데 미국 사회가 소홀했고, 미국의 번영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탱했던 러스트 벨트에 대한 사회적 존중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들의 불만이 극단화된 MAGA 운동의 경우, 복잡한 사회 체계를 제대로 이해해 보려고 했는지 의문이다. 사회는 계속 복잡해진다. 트럼프가 대통령 미국에 제조업 일자리를 만들려면 아시아에서 숙련 엔지니어를 데려와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이 다원화된 사회로서 기독교적 가치뿐 아니라 유교적 가치 등 다른 가치를 가진 구성원도 수용할 수 있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치 다원주의,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PC(정치적 올바름) 사상의 순기능도 일부 인정해야 한다.
허무주의의 위험
물론 가치 다원주의도 너무 극단으로 가면 문제가 생긴다. 사회는 경제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정치 공동체이기도 하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데, 가치의 다원성이 극단으로 가면 "모든 가치가 무의미한 거 아니야?"라는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다원성의 한계
고대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사형이 좋은 예다. 정치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아테네가 번영하자 그리스 세계의 지식인들(소피스트들)이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각자 자기주장을 설파하니 다원성이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가 붕괴 직전까지 갔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진리와 이성을 주장했다. 본인도 인간의 이성이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보편성을 만들어내야 사회가 유지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 입장에서는 "완전히 보편적인 건 없으니 다수결로 의사결정하자"는 민주정의 합리성을 믿었고, 소크라테스의 보편 주장이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졌다. 보편적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를 알아낼 수 있는 소수의 현인들이 통치하는 체제가 더 나은 체제일 수 있다는 논의가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 쿠데타를 일으킨 이들도 있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지고 있던 아테네에서, 제자들 중 일부가 과두정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쫓겨났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너무 많은 폭군(소피스트)들이 날뛰니까, 대항 폭군으로 소크라테스가 '보편 이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지식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까? 지식인이라고 자칭하기엔 부끄럽지만, 우리는 소프트웨어 개발의 배경을 가지고 있고, 기술 혁신과 스타트업 문화를 선용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택시 기사의 저항: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친구가 경험한 사례가 인상적이었다. 지방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카카오 T를 쓰지 말라고 했다. "수수료를 너무 많이 떼간다"며.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라고 물었더니 답이 걸작이었다: "카카오 T를 쓰지 말아야 한다. 옛날처럼 길에서 손 들고 택시를 잡아야 한다."
과거로의 회귀. 하지만 이미 더 나은 서비스를 경험한 국민들에게 그걸 금지하는 건, 친구 표현대로 "일종의 국민 착취"다.
그렇다고 택시 기사들을 비난할 수만도 없다. 플랫폼 수수료가 과도하다고 느낄 만한 여지도 확실히 있고,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고 재훈련받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은 개인의 입장에선 막대하다. 시위하고 기존 면허의 권리를 주장하는 게 개인으로서는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가속주의: 기술 혁신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 혁신을 저해하면 문제가 된다. 국제 경쟁이 있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 기술이 발전하는데 국내만 막으면? 모든 선진국 주요 도시에 자율주행차가 다니는데 서울만 안 다니면? 산업이 뒤처지고 관광객 유치도 어려워진다.
친구가 말했듯, 자율주행차 시대가 오면 "택시 기사님들과 대화할 필요도 없고, 더 안전하게 운전하고, 심지어 엔터테인먼트까지 즐길 수 있다." 소비자들은 반길 수밖에 없다.
나는 가속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온다. 기술 가속의 현실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걸 선용하자.
당랑거철(當螳螂車): 지식인의 딜레마
강신주 박사님이 『강신주의 장자 수업』에서 재해석한 고사성어가 생각났다. "사마귀가 수레에 맞선다(當螳螂車)." 하지만 어떤 사마귀들은 수레에 탔다.
전국시대 묵가(墨家) 지식인들 이야기다. 묵가는 원래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며 겸애(兼愛)를 설파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진나라로 가서 전쟁 무기를 만들어줬다.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었다. 왜? "제일 센 나라한테 힘을 몰아줘서 중원을 통일하면,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신주 박사님은 이를 지식인의 딜레마로 해석한다.
수레에 탄 사람 입장: "내가 안 탔으면 수레가 더 폭주했을 수도 있다. 나는 이걸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수레에 타지 않은 사람들 입장: "네가 억압적 수레를 조금 덜 억압적으로 만들어서, 이 체제가 더 오래 지속되게 만든 거 아니냐?"
이 구절에서 나는 움찔했다. 내가 가진 기술을 선용해서 사회를 개선한다는 기획이, 오히려 억압적 체제를 견딜 만하게 만드는 기만술에 불과한 것 아닐까?
나의 입장: 돌을 줄이기
강신주 박사님은 말한다. "인문주의자는 저 큰 돌이 있으니까 우리 돌을 치우자고 끊임없이 외치는 사람"이라고.
나도 돌(인간을 억압하는 체제)이 없어져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 돌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나는 돌을 줄일 수 있다.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노동 시간이 계속해서 줄어왔다. 지금은 주 40시간 일하지만,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다.
기초 생활 수급자, 장애인, 노약자를 복지로서 더 보듬을 수 있게 됐다.
나는 마르크스처럼 돌을 한꺼번에 치우기 위한 혁명을 주장할 능력도, 확신도 없다. 하지만 현 체제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나만의 방식으로 기여하면서, 그렇게 얻은 발언권으로 덜 억압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체제의 기만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비판적 의식은 항상 가지고 있으려 한다.
마르크스의 사회학적 통찰
나는 대학생 때 마르크스 경제학 입문 강의를 경제학 전공과목으로 수강하기도 했고,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론 강의』라는 책을 읽어보기도 했다.
공부를 해본 뒤 내린 내 결론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이 경제학적 정밀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가치설은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는 유용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열악한 조건에서 장시간 노동하며 착취당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경제는 달라졌다:
- 무형자산(특허, 브랜드, 데이터)의 가치가 유형자산을 초과한다
- 지식 노동자는 생산수단(지식, 특히 암묵지)을 소유하며 높은 협상력을 가진다
- 벤처캐피털은 위험 감수의 대가로 수익을 얻는다
이런 현실을 '노동이 만든 가치의 이전'으로만 설명하긴 어렵다. 마르크스의 통찰(노동과 자본의 권력 비대칭)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가치 이론 자체는 현대 경제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회학적 비판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인간이 자유롭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한다. 이게 진정한 자유인인가? 외주화된 노예 아닌가? '자기 계발'이라는 명목으로 채찍질하며, 스스로를 외부의 기준으로 평가되는 생산성 향상의 굴레에 빠뜨린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은 소외된다. 이게 자유 체제인가?"
날카로운 지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현실 사회주의 실험을 해보니 더 심한 억압 체제가 됐다. 소련, 중국, 베트남...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실 사회주의가 진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그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더 실험을 하기엔 이전 실험들의 결과가 너무나 끔찍했다.
미래로의 유예
부산대 철학과 박사과정 중인 홍준성 소설가님이 『우리는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구원을 미래로 유예하면서 현 체제를 이어간다."
진짜 그렇다. 경제적 자유를 '모두'에게 주면 일은 누가 하나? 사실 소수의 경제적 자유를 허용하면서,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 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든다. 모두에게 당근을 던진다.
Greedy work와 노동의 다원화
경제적 자유 하니 최근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이 『커리어와 가정』에서 내놓은 노동의 구분이 생각났다.
Greedy work: 경쟁하고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이 선택. 노동시간을 정해놓을 수 없는 대신에 보상의 업사이드가 열려 있음.
Flexible work: 한 주에 정해진 시간만큼(주로 40시간) 일하고 균형 잡힌 삶을 원하는 사람들이 선택
이전 시대의 혁신이었다가 지금은 유지, 보수 정도가 필요한 산업으로 남은 분야는 Flexible work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반면 AI, 첨단 반도체 등 새롭게 혁신이 일어나는 분야는 Greedy work의 효율성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처럼 노동의 형태가 다원화되면서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형태의 일을 선택할 자유가 증진되고, 분업이 일어나며 사회가 발전해 나간다. 실제로 Greedy work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소수에게 경제적 자유의 기회가 생겨난 것은 사실이고, 이들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스타트업 초기에 지분을 받고 합류했다가 스타트업이 성공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굉장히 적기 때문에 홍준성 소설가 님처럼 이를 기만으로 볼 수도 있다.
푸코와 포스트모던의 한계
마르크스라는 탁월한 비판자에 이어 우리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로 대화 주제를 옮겼다. 『감시와 처벌』과 『광기의 역사』에서 드러난 푸코의 사상은 기존 감옥 체계나 정신병원 체계에 대한 비판으로서 훌륭하다. 하지만 주류화되기에는 원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의 사상을 살펴보면 "모든 사법 체계가 없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있다. 무정부주의에 가깝다. 물론 푸코는 통치성 개념을 통해 새로운 체제를 구상했지만 현실성이 다소 부족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좋은 체제를 만들려면, 그 체제에 대한 정당화도 필요하고 설득도 필요하다. 푸코 같은 사상은 체제의 비판으로서 의미가 있지, 실제 제도로 들어오는 데는 한계가 있다.
프레임 재설정: 진정한 게임
그리고 부정에서 그치면 안 된다. 기존 사회가 그걸 긍정하는 데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반(反)을 통해서 합(合)으로 나아가야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반출생주의를 생각해 보자. 나는 반출생주의가 반에서 그친다고 본다. 생을 부정하는 데서 끝난다. 또한 반출생주의가 엄청나게 퍼진 사회는 존립이 안 될 것이다.
물론 반출생주의는 "일단 태어난 사람들끼리는 잘 살아보자"는 입장이니 당장은 사회가 지속 가능하고, AI와 로봇이 극도로 발전하면 장기 지속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현 수준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가속주의자인 나조차도 이런 미래를 예측하는 데는 신중해진다.
반출생주의는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강렬한 비판으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니체가 인습적인 도덕을 망치로 깨버린 것처럼, 반출생주의는 인간을 도구로 보는, 기능적 합리성으로 가득 찬 사회에 대한 극단적 반발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만, 주류가 되기는 힘들다.
나가며: 추상과 실행 사이에서
친구와의 대화는 항상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우리는 철학적 개념들을 논하지만, 결국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는 최근 깨달았다. "부정에서 그치지 않고, 긍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프레임을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리고 친구가 말했듯, "생각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 그보다는 내가 정말 사유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것. 그러다 보니 실행력도 올라간다고.
세상은 복잡하고 다원적이다. 하지만 그 복잡성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돌을 줄일 수 있다. 혁명을 넘어 개선으로, 부정을 넘어 긍정으로, 추상을 넘어 실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