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매우 뛰어난 작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읽는 것이 때로는 괴로웠다. 내 삶의 진실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다.
무거울수록 진실해진다
쿤데라는 소설 첫 페이지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꺼낸다. 그냥 꺼내는 게 아니라, 뒤집어서 꺼낸다.
영원회귀가 없다면, 삶은 한 번 살고 사라지는 그림자 같은 것이고,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더라도 결국 무의미하다. 이 진실을 마주하면 가볍게 살아도 된다는 자유가 생긴다. 그러나 니체는 역설적으로 요청한다. 무겁게 살아라. 쿤데라는 말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가벼워진다면, 누군가 잡아주지 않을 경우 어디론가 날아가버린다. 의미 있는 선택을 할 때만 무게가 생기고, 무게가 있을 때만 지상에 발을 딛는다.
사비나가 보여준 것
소설 속 사비나는 네 명의 주인공 중 가장 가벼운 인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배신하고 도망간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도망치고, 결혼에서 도망치고,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이혼한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체코에서 스위스로, 파리로, 뉴욕으로, 캘리포니아로. 모든 의미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완벽한 가벼움을 획득한다.
그런데 그 사비나조차 말년에 가벼운 삶을 견디지 못한다. 캘리포니아에서 후원자인 노 부부의 화목한 가정을 보며, 마음속에서 그 따뜻한 의미 추구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소설에서 사라진다.
이런 삶은 헬륨 풍선 같은 삶 아닐까. 누가 잡아주지 않으면 그냥 날아가 버린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내 삶을 돌아봤다. 대학교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계획했던 영국 교환학생을 취소하고 물리학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경제학이 진리 탐구의 충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단단한 언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때 내가 택할 수 있었던 가장 과감한 액션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영국 교환학생도 사실 두려웠다. 4학년이 되면 시작되는 연구의 세계, 학습이 아니라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는 그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 무서웠다. 물리학 복수전공은 그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일이기도 했다.
물리학을 1년간 공부해 보니 단단한 언어란 처음부터 없었다. 뉴턴의 고전역학조차 적용할 때는 수많은 근사가 필요했고, 결국 모든 학문은 하나의 모델링이었다. 도망쳐 왔는데 도망칠 곳이 없었다는 느낌이랄까. 1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사비나처럼 다시 배신을 택했다. 경제학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기정보공학 복수전공을 시작했다. 그런데 공부를 계속하면서 어느 순간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해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지, 엔지니어링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에는 흥미가 가지 않았다. 재능의 문제인지, 흥미의 문제인지, 아니면 또 다른 도망인지 —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 자각이 에너지를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죽여버린 가능성들
배신의 패턴은 졸업 이후에도 이어졌다. 스타트업의 개발자 겸 기획자로, 컨설턴트로. 다시 스타트업의 CEO Staff로. 부끄럽게도 나는 내 정체성을 직업에 걸기보다는 회사라는 콘텐츠의 적절한 참여자이자 소비자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던 중, 작년 여름 여행한 베네치아에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수상 도시, 너무 아름답다!” 며 감탄했지만, 그 도시는 외적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 후손들을 위해 알프스에서 수백만 그루의 소나무를 벌목해 모래섬에 박아 넣은 고행의 결과물이었다. 나는 그 헌신의 결과를 피상적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소비를 멈추고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이 그때였다.
그리고 쿤데라에게서 그 다짐이 왜 두려운지를 읽었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내가 오해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순간, 내가 될 수 있었던 다른 나들이 죽는다.
나는 14학번인데, 슬슬 내 동기 분들 중에 대학 교수로 임용된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제학 한 길을 쭉 팠다면 나도 지금쯤 교수가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죽였다.
개발자로 대성한 나, 큰 컨설팅 펌의 파트너가 된 나. 상상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길로 가지 않을 예정이다. 그들 역시 죽었다. 내 컴퓨터의 로컬 파일들에 쌓인 개발, 컨설팅 자료들은 이제 거의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인간 관계도 그렇다. 고등학생 때 친해졌던 친구들과 이제 거의 연락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세계가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허황된 말로 들리나 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 역시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 만남은 죽어 박제되었다. 씁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나는 그들을 '졸업'한 것이다.
소설이라는 실험실
쿤데라는 소설 속 인물들이 자생적인 힘을 가진다고 했다. 세계를 창조하고 나면, 그 세계의 논리가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내가 직접 살지 못한 가능성들을 인물로 만들어 끝까지 밀어붙여보는 것. 내 무의식이 어떤 경계선 너머를 그리워하는지, 인물이 보여준다. 내가 가지 못한 삶을, 내 안에서 나온 누군가가 대신 살아준다.
그래서 소설을 쓰는 것은 내가 죽인 가능성들에 대한 애도다.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진지한 형태의 애도.
한번 소설을 써볼까 싶다. 내가 되지 못한 나들을 인물로 만들어, 그들이 어떤 경계선을 넘는지 끝까지 따라가 보고 싶다.
나가며
어떤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을 죽이는 것이기도 하다. 죽은 미래의 나들을 충분히 애도했다면, 이제 그냥 해야 한다. 살아있는 사람은 선택을 통해서만 무게를 갖는다.
나는 아직 어떤 경계선을 넘을지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걷지 않은 길들을 먼저 글로 써볼 생각이다. 그것이 가장 정직한 시작일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