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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Mar 24. 2023

호구공포증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누구나 자기 성격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최소 하나쯤은 있잖아요? 정말 끔찍이 싫어하는데 고쳐지지 않는 점. 번번이 이불킥을 하게 만드는 점. 나면서부터 혹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성정과, 성장하면서 경험이나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자기 가치관 간에 간극이 크면 클수록 이런 자기혐오가 심해집니다. 어떤 이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항상 주저하는 자기 모습을 혐오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금융치료를 아무리 받아도 고쳐지지 않는 욱하는 성질 때문에 결국 패가망신하기도 하죠. 이성적으로는 알아요. 이렇게 사는 게 무척 추하다는 걸. 그래서 안 그러려고 하는데 그게 거의 무조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거죠. 그리고는 또 자기혐오에 빠지는 악순환이 됩니다. 저는요? 무척 부끄러운 얘기지만, 음, 제가 좀 그래요. 그러니까, 음, ‘바보처럼 아무 소리 못 하고 당하는 것’에 공포감을 종종 느낍니다.


난 도대체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하면서 수없이 고쳐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됩니다. 50년 넘게 살다 보니까 솔직히 좀 속고 당하고 산다고 해서 인생에 별 크게 영향을 주는 일이 없다는 걸 알아요. 아니, 사실 뭐 있긴 있겠죠. 사기를 당하거나 보이스 피싱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있구요. 하지만 정작 그것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경우는 대개 바보처럼 당했다는 치욕감을 못 이겨서 그렇잖아요, 재산상의 피해 때문이 아니라. 이런 걸 다 잘 알아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도무지 내 성질을 이기지 못하겠더라구요.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는 이민자로 살게 되면서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콤플렉스의 반증이라는 뜻이겠죠. 소매업에서 일을 할 때 한 번은 매장에서 어떤 도둑놈이 매장에 전시된 게임을 가방에 쓸어 담은 후 그대로 튀던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매일 이깟 회사 때려치겠다, 하며 회사 욕을 그렇게 하고 다녔었는데 막상 내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꼭지가 확 돌아서 경비견 마냥 추격전을 벌인 적도 있었어요. 결국 붙잡지도 못하고 회사에 (직무에 벗어나는) 고객 체포 시도를 했다고 시말서를 썼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이 성격이 가장 꼴불견으로 보이는 상황은 물건을 구입할 때입니다. 정말 한 푼이라도 손해 안 보려고 궁리하는 제 모습. 어떻게 보면 검약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그냥 호구 잡히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걸 거예요. 금전적 손해를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모욕감을" 주는 상대를 용서를 못 하는 것이죠. 각각의 물건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내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결정하고, 각 판매처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존중하자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고 있지만,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비싸게 사면 왠지 싸움에서 지는 걸로, 생존경쟁에서 탈락하는 느낌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거죠. 이 세상은 전쟁터이고 단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그 자리에서 아웃되는 상황으로 느껴지는 거구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주변을 돌아보면 이게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특히 경쟁이 심한 나라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사람들 대부분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가끔은 이 '호구공포증'이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상식처럼 여겨진다는 겁니다. 종종 우리는 착한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얘기하지 않나요.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어?"


사실 '속는 놈이 바보'라는 가치관은 생존경쟁이 치열한 개발도상국에서 번번이 통용되는 얘기이기도 해요. 한국의 80년대 어느 순간에 와서는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유대인의 자녀교육'이라는 부제를 달고 <탈무드>가 학부모들에게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당연스러운 것처럼 저희 집에도 한 권 있었습니다. 그 출처가 서점인지 리어카 (예전에는 정식 출판업 등록이나 신고를 하지 않은 야매 출판물을 리어카에서 팔았습니다. 원작자에게 허락받지 않은 불량 속편들, 당시 한국에선 금지되었던 포르노 잡지 등도 여기서 구입을 했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어린 저에게 그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구절은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안 나지만) 다음과 같아요;


닭을 도난당했다면 그냥 잠자코 있다가 옆 집 닭을 몰래 훔쳐라. 만일 도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그날 밤 동네의 모든 닭장에 자물쇠가 걸릴 것이다.


와. 정말... 어쩌자고 저런 얘기를 인생의 지혜랍시고 어린아이들에게 전했던 걸까요?








뭐, 혹자는 7~80년대에는 없이 살아도 정이 많았고 동네 전체에서 아이를 키워서 애들이 굶는 일이 었었다고 회고하지만, 항상 그렇게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바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대로변에서 봉고차로 여성을 납치해서 사창가에 넘기는 인신매매단들이 있었죠. 어린이 유괴 범죄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있었고, CC-TV가 없었으니까 소매치기는 말도 못 하죠. 딱 지금 브라질이나 멕시코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한복판에서 볼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생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컸습니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속담처럼,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주는 일이 있었으니까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긴장하면서 살았고, 단 한순간이라도 양보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기능적인 것 하나를 배우더라도 보다 더 경력이 많은 선배들 외에는 다른 경로가 없었으니 노인들의 꼰대짓도 지금보다 훠얼씬 심했었죠. 그만큼 폐쇄적이기도 했구요. 외지인이 나타나면 경계를 하거나 증오를 해야 했고요. 그가 간첩이 아니라 할지라도 당장 내 생존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만큼 매일매일이 전쟁터였어요.


저런 탈무드의 격언이 먹혀 들어가는 건 비단 한국뿐만이 아니었을 거예요. 대부분의 저개발 사회에서 매일매일 전쟁터처럼 삽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빗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역시 비슷한 내용의 사회고발 영화입니다. 전후 이탈리아 역시 '나 역시 도둑이 되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기 어려운 사회'였던 거죠. 예전에 컴퓨터 매장에서 근무할 때 사례를 하나 더 들자면, (15년 전) 그 당시에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컴퓨터를 사러 오면, 꼭 상자를 열어서 정품인지, 혹은 불량품인지 확인을 했습니다. 물건 구매 후 15일 이내에는 무조건 환불이 가능한 PL 법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직장 동료들은, 중국 유학생들의 그런 행태에 대해 완전 경악했었어요. 근데 전 너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잖아요. 저도 용산이나 남대문에서 카메라나 노트북을 살 때, 포장 다 까서 정품인지 확인하고 데드픽셀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샀었거든요. 90년대 한국도 그런 체크를 안 하고 샀다가 불량품이라도 걸리면 완전 호구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에 비교하자면, 저개발 사회의 범죄들은 이제 한국에서 많이 줄어든 것으로 체감됩니다. 비록 통계청 지표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인구 10만 명당 강력범죄 비율은 두 배 이상 증가한 걸로 나오지만, 그건 '범죄'라고 규정하는 범위가 예전에 비해 몇십 배로 커져서 생긴 착시일 겁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른 교사들의 체벌을 다 특수폭행 / 상해죄로 규정했다면 다르겠죠. 내가 당하고도 입소문이 두려워서 쉬쉬하면 숨어 살아야 했던 수많은 성폭력들을 고발했다면 또 다를 테구요. 이제 한국은 7~80년대에 비해서 GDP규모가 900배 정도 성장했고 이제 GDP 만 따져서는 세계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입니다. 쉽게 말해 다른 나라에 관광을 가면 그 나라 상인들이 '한국인들은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게 돈을 잘 쓰겠구나'하며 기대를 한다는 뜻이겠죠. 그런데 왜 아직 이렇게 모든 사회가 호구 잡히는 것에 두려워하는 걸까요?


처음에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는 등, IMF 경제 위기 때의 참혹했던 상황이 한국 전쟁만큼이나 상흔을 남겼고, 어린 시절 그 당시를 겪으며 자란 세대가 이제 사회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런 공포감이 이어진 거라고 생각도 해봤습니다. 생존을 위해 개개인의 더 강한 긴장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여전히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종종 눈에 띄는 이중성은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최근 유행하는 여행 프로그램들을 보면 관광지에서 바가지를 씌우는 현지 상인들을 마치 무슨 부모의 원수처럼 생각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상품의 가치를 자기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결정하지 못하니까, 그 상품의 원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형 커피 체인에서 커피를 사 마실 때에는 현지 원가를 고려하지는 않잖아요. 결국 이런 호구공포증 역시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이 이면에는 인간의 그 어떤 능력보다 지적능력을 우선시하는 현재 한국 사회 분위기가 연관되어 있다는 걸 부정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반지성'과 '무지'가 당당히 혐오용어로 사용되고 있고, 그 반대로 '공감은 지능순'이라는 밈으로 사람들의 공감과 배려를 독려하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분석은 일단 논외로 하고, 이렇게 지능 숭배가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를 잡다 보니 누구나 다 인정하는 악당들에게는 무척 너그러워지는 현상도 나타나게 됩니다. 적어도 저 악당이 나쁜 놈이라는 걸 난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내 지적능력에 대한 모욕감은 느끼지 않기 때문이겠죠. 스타벅스 커피가 저개발 국가의 커피농장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을 가능성, 그리고 수많은 유통과 서비스 단계를 겪으면서 원가의 50배 이상 뻥튀기해서 가격을 붙였을 가능성에 대해 모두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시장 소년에게 50배의 가격을 들었을 때보다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현 윤석열 정부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 것 같아요.


많은 유권자들이 현재 야당인 민주당에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물론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워낙에 실망스러운 짓거리를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요.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보수 야당, 워낙에 그 나물에 그 밥인 기득권층을 애초에 왜 믿었나?' 따위의 말은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따라서, 혹은 막연한 기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선의로 민주당을 믿은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80석을 줬는데도 사회적 참사의 진상 규명도 없고 개혁법안들 역시 제대로 얻어내지 못할 정도로 잘못은 아니라는 거죠. 그렇더라도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민주당에 대해 과도한 증오를 퍼붓는 건 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민주당이 아무리 위선자들이고 더러운 거짓말쟁이들이지만, 그들의 기만을 징벌하기 위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만큼 대놓고 범죄자인 사람들에게 정권을 몇 번씩 넘기는 건, 지금으로선 그냥 선택적으로 호구 잡히기 싫어하는 사회적 정서 탓으로 밖에 해석이 안될 것 같습니다. 저런 적나라한 악당들이 나쁜 짓을 하면, 난 그런 놈들인지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내 지성에 대한 모독은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믿었던 놈들이 조금이라도 배신을 하면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근데 이건 마치, 일진들에게 삥 뜯기고 얻어맞고 할 때는 아무 소리 못 하다가, 옆에 친구가 "선생님한테 대신 말해줄까?"라고 말하면, "조까, 씨바. 너도 내가 좆밥으로 보이냐?" 하며 비겁한 투정을 하는 것 같잖아요.


위선과 기만에 대한 혐오는 정당합니다. 유권자로서 계속 경계하고 견제할 일이죠. 하지만 그걸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방향이 많이 뒤틀린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사회 전반적으로 깔린 호구공포증을 없애기 위해서는, 법률이나 시스템 정비를 통해서 내가 스스로의 양심만 건사하고 살아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방법이겠죠. 내가 깜빡 실수를 하더라도 크게 다치지 않고,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사람들 관계에도 보다 많은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은 내 개인적인 징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고, 작금의 이중적 잣대를 해결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내가 호구를 당하더라도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장기적인 면에서 내가 한번 양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결국, 사회가 바뀌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뀌면서 가능한 거잖아요. 더러운 물을 맑게 하는 건 결국 맑은 물밖에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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