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화처럼 산다면야> 동상이몽 제작일지 03
왜 그런 날 있잖아요. 귀찮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 얼렁 씻고 자고 싶은데, 혹은 예능 보면서 늘어지고 싶은데 배는 고픈 날. 하지만 도저히 요리를 할 기운이 없는 날. 그럼 스윽 아내 눈치를 봅니다.
- 배달 시켜 먹자.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내가 쏠게.
여기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아내의 대답은 이거예요.
- 난 다 좋아. 자기 먹고 싶은거 시켜
여기까지는 무척 평화로운 부부관계같지만 이제부터 엄청난 눈치게임이 시작됩니다.
- 간만에 짱깨?
- 어우, 요 며칠 탄수화물 넘 많이 먹어서...
- 그럼 날도 더운데 치맥?
- 이 시간에 치킨은 좀 아니지 않아?
- 그럼... 순대국?
- 우웅. 소금은 지금 못 먹겠어. 그건 빼고
......
......
- 니가 시켜, 그냥.
이렇게 몇차례 투닥거림이 지속되다가 결국은 냉파(냉장고 파먹기)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먹다 남은 모든 반찬들을 창고 대방출하는 날이 되는 셈이기 때문에 딱히 불만은 없지만요. 사실 같이 산지 20년이 넘었다고 해도 그건 그냥 숫자일 뿐, 어차피 부부도 남이기 때문에 배달음식 메뉴 하나 같이 정하는 것도 너무 힘든 법이죠. 한 사람이 강력한 의지로 (그만큼 강력한 반발을 각오하고) 밀어붙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치밀한 밀당의 전개가 요구되는 날이 많습니다.
하지만 종종 우연의 일치인지 당시 상황의 맥락이 그렇게 유도를 했는지 두 사람이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죠. 그렇다 하더라도 일의 결과가 나올 때쯤이면 누가 처음 말을 꺼냈는지 가물가물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과에 따라서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와 같은 자뻑이나 "아니,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네!"와 같은 질타가 난무하기도 합니다 (우리 부부만 그런가요?). 때문에 비슷한 생각이 들더라도 와락 떠안기 보다는 조심스레 츤데레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엊그제는 캠핑에서 돌아와 무척 피곤해 있었는데 시원한 맥주랑 치킨 생각이 간절하더라구요. 하지만 어디 그런 걸 쉽게 먼저 입 밖에 낼 수가 있나요. 그런데 마침 아내가 치킨을 먹고 싶다고 하지 뭐예요. 그래서 그랬죠.
- 으...응... 뭐... 흐음... 뭐, 그러덩가.
그러곤 혼자 다섯 조각을 먹었지만요.
2022년도 여름이었어요. 7월 말 쯤. 제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영화를 보고 열광해서 길게 글을 쓴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장정일 글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 같았다고 언급했었는데, 거기에 또 이연 작가님이 장정일 글에 대한 기억을 길게 쓰셨었죠. 그렇게 이연 작가님과 몇 차례 댓글을 교환한 후에 이연 작가님이 김중혁, 김연수의 <대책없이 해피엔딩>을 필타해서 메일로 보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책을 쓰고 싶다고. 같이. 그런데 딱 잘라서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은 아니고, 제가 좀 더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라는 단서를 붙이는 걸 잊지 않으시더라구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이 양반. 정말 밀당의 고수시구나. 내가 미처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계신 분이구나. 왜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잖아요.
마침, 느닷없는 송충이 알러지 때문에 집에서 쉬고 있던 차에 감사히 필타하신 글을 읽었어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는 글을 같이 쓰면 실시간 댓글 교환과 같은 대담집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교환일기에 가까운 기획이더라구요. 아...... 근데 전 교환일기에 무척 안 좋은 기억이 있었거든요. 대학 신입생 때 상대방이 밑도 끝도 없이 일기장을 들고 튀어버린. 아 물론 이제와서 생각하면, 제가 얼마나 자의식 가득한 헛소리만 쓰고 꼴 사납게 징징댔으면 일기장을 다 들고 튈 생각을 했겠어요. 그렇게 겁을 내던 차였는데 이연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이 글만 봐서는 마치 이연 작가님이 먼저 제안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저 역시 며칠 전 치킨이 떙기던 날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왠지 같이 글을 쓰고 싶은 심정. 하지만 이 밀당 고수에게는 자칫 잘못 튕겼다가 본전도 못 찾게 될 것 같은 싸늘함. 그래서 까불지 않고 넙죽 물었습죠. 못 빠져나가게. 안 할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편지 쓰는 걸 딱히 싫어하지 않는데 그것도 평소 좋아하는 작가와 편지를 나누는 일이라니요! 그러니까 결국, 순전히 쓰는 즐거움, 대화하는 즐거움, 개인적인 쾌락을 위해서 이 꿍꿍이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게다가 글은 써두면 어차피 남는 거니까.
지난 2회에서 이연 작가님은 순전히 제 글이 좋아서, 아름다워서 같이 글을 쓰고 싶었던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날고 기는 작가들이 넘쳐나는 브런치에서 이연 작가님과 같이 책을 기획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저 하나 뿐이었겠어요? 제가 외국에 살기 때문에 일기장을 들고 튀어도 쉽게 못 쫒아올 거라는 안심이 90% 작용했다는데 제 500원을 걸겠습니다. 그래서 엄포를 놓기도 했어요.
이후에 구체적인 - 주제, 형태, 분량 등 - 제안이 담긴 메일이 오고 갔습니다.
사실 전 처음엔 상업용 책을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선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 하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만나서 한 영화를 같이 보고 대화를 나누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었던 거죠. 영화를 보고 그걸 내 것으로 하는 과정에서 (내 시각에 대해 반박하는 걸 포함) 다른 사람의 재밌는 의견을 듣는 것만큼 영화 감상을 풍부하게 해주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이런 경험이 너무 고팠는데, 밴쿠버 교민들과 독서 모임, 영화 감상 모임, 영화제까지 다 해봤었지만 내 맘처럼 진행되지는 않았었거든요. 최소한 그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봐야 하는 여유와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그렇지만 예의 바르게 다른 사람 앞에서 발표하고 상대의 의견을 듣는 일도 연습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이연 작가님과의 작업은 그런 초반 연습이나 짜 맞추기가 없이 처음부터 쉽게 쉽게 진행되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빌미로 각자의 삶에 대해 쓰는 것이었는데, 각자 가지고 있던 개인적 경험들 - 가족, 투병생활, 이민 등 - 을 털어놓는 것도 어렵지 않았어요. 서로 얼굴도 실명도 몰라서 오히려 더 수월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이런 식의 영화 에세이가 시장에 얼마나 수요가 있겠느냐에 대한 궁금증은 있었어요. 제 글의 상업성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싶기도 했구요. 그래도 그건 좀 더 먼 얘기. 그리고 또 뭣하면 그딴 건 몰라도 상관없다 싶었어요. 말씀드렸지만 그냥 소통의 즐거움, 개인적인 쾌락을 위한 꿍꿍이에서 비롯된 거라서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즐겁기 위해 쓴 글을 사람들에게 돈 내고 읽으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양심 가책을 좀 느끼기도 했었죠. 내가 알고 있는 경제활동이라는 것에선, 내가 이렇게까지 재미있고 즐거우면 안 될 것 같은 위화감이 있었거든요. 어쩌면 이 때부터 이 모든 사단이 "거봐, 내가 뭐랬어."로 끝날지 "아니, 도대체 왜..?'로 끝날지 걱정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웬만하면 "거봐~" 로 끝나길 바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