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화처럼 산다면야> 동상이몽 제작일지 #19
처음에 정했던 제목은 <그의 영화 나의 댓글>이었습니다. 왠지 '한 영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시각'이라는 우리 꿍꿍이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고 입에도 착착 달라붙는 것 같아서. 그래서 1차 원고가 나오고 지인들에게 돌려볼 때까지도 이 가제를 계속 사용했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제목은 바꾸는 게 좋지 않겠냐는 조언이 많더군요. 상업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도 과연 이 제목이 고객의 주머니를 열만큼 매력적인가라는 의문이었던 거죠. 게다가 제목을 궁리하는 와중에 매우 유사한 제목이 잡지 칼럼 제목으로 이미 사용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출판사와 맨 처음 편집회의를 할 때부터 제목에 대한 얘기를 안건으로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첫 번째 회의 때부터 제목이 덜컹 결정될 리는 없겠죠.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마지막까지 계속 생각을 하자고 봉합했습니다. 근데... 전 정말 이런 쪽으로는 완전 꽝인지 괜찮은 제목이 도무지 안 떠오르더라구요. 이연 작가님은 계속 던지는데 거기에 툭툭 토만 달았지, 뭔가 그럴듯한 아이디어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시장에서 책 제목하나가 매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했을 때, 3개월 동안 혼자 이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면 무진장 괴로웠을 것 같아요. 그나마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부담이 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연 작가님이 어느 날 번쩍! 하며 몇 개를 던지시는데, 그중에서 <영화 말고 내 얘길 좀 들어보라고>가 귀에 쏙 박히더라구요. 약간 고쳐서 <영화 말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요렇게. 줄이면 <영말내말>. 귀에 착착 감기면서도 우리 책 스타일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최종 결정의 순간이 오면 이걸 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리고 책 편집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표지 디자인과 제목에 대해 다시 얘기할 때가 왔습니다. 이것도 참, 어쩌다 보니 표지 디자인도 자연스럽게 떠맡는 걸로 되어 버렸는데, 사실 출판사와 계약하기 이전부터 이랬으면 좋겠다... 바람을 담은 구상은 있었어요. 밴쿠버와 서울에서 각각 영화에 대해 쓰고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 옛날 영화표를 각 나라 랜드마크 배경으로 들고 있는 손이라든지, (미국식) 옛날 극장 간판과 입구모양의 디자인, 혹은 텅 빈 극장에 각기 떨어져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디자인 같은 거였죠. 그런데 그때는 가제 <그의 영화 나의 댓글>과 어울리는 표지 디자인이었어서, 그 가제가 폐기된 이상 예전 구상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더랬죠.
책 속에 실린 포스터 그림들을 콜라주 해서 표지를 만드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옛날에 명절 선물로 많이 팔던 과자 종합선물세트 포장을 투명하게 만드는 거랑 다를 바 없잖아요. 스팸처럼 그 자체로 이미 지명도를 쌓은 제품이야 그런 자신감을 가져도 할 말이 없겠지만, 우리 책처럼 맨 땅에 헤딩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면 표지라도 손 한 번 더 갈 수 있도록 새로 만드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저는 시각적 이미지에 의존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일단 제목이 정해지면 표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편이어서, 제목을 빨리 정하는 게 표지 구상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죠.
회의 도중에 편집장님이 그런 얘길 하시더라구요. 자기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한 때 영화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꾸던 시절을 돌이켜 보게끔 하고 싶다고. 그래서 편집장님이 낸 후보는 <영화 같은 삶>, <영화처럼 사는 것>이었어요. 그걸 듣고 번뜩 생각이 났잖아요. 이연 작가님이 <라라랜드>를 보고 쓴 <영화로운...> 꼭지에 "뭐가 됐든, 장르는 알아서. ‘영화처럼 산다면야!’"라는 구절이 나온다는 걸. 그래서 그 제목에 모두 환호를 지르며 동의했어요. 단지 저로서는 <영말내말>도 포기하기 무척 아깝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지만요.
물론 책 제목은 배급과 마케팅을 담당하는 출판사에 결정권이 있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를 했지만, 저자 한 명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단번에 결정할 수는 없었나 봐요. 그래서 좀 더 생각해 보고 다음 회의 때 결정하자고, 그렇게 얘기하면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영화처럼 산다면야>라는 제목을 곱씹어보니 확 그려지더군요. 표지 이미지가. 마치 <라라랜드>의 한 장면과 같은, 아니면 다른 노스탤지어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저 제목과 붙여야겠다... 하고 말이죠. 사실 <영화 말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에서는 이렇게까지 쉽게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영말내말>을 포기하고 <영화처럼 산다면야>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걸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한국에서 책을 살 때마다 띠지의 용도가 항상 궁금했었거든요. 물론 어디서 수상 경력이 있으면 "~~ 상 수상"이라는, 혹은 유명 작가의 경우 작가 사진을 근사하게 박아 놓고 "~~~ 작가의 신작", 뭐 이런 (책 표지에 싣기 좀 낯 간지러운) 홍보문구를 잔뜩 써넣는 용도로는 더할 나위 없겠죠. 특히 책을 구매할 때 표지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경우에는 더. 하지만, 유명 작가도 아니고 수상경력도 없는 경우에도 관성적으로 띠지를 만들어서 책에 얹어 파는 걸 보고, 저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종종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영화처럼 산다면야>라는 제목과 함께 영화 <라라랜드>의 한 장면을 차용해서 표지를 만들면, 띠지를 이용해 주인공들이 춤을 추는 애니메이션을 재현할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영화 도입부 차량 행렬 시퀀스의 군무, 혹은 달빛 아래 탭댄스 장면 같은. 애니메이션 길이나 프레임 수에 한계가 있어서 그리 인기는 없지만 그래도 그림 한 장으로 연출할 수 있는 '스캐니메이션'이라는 기법을 알고 있었거든요.
차량 행렬 장면은... 사실 화질도 화질이지만, 딱히 별 다른 상상력 없이 영화 속 한 장면을 베껴낸 그림이라서, 그걸 본문에도 싣고 표지로 또 싣기는 좀 저어 되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군무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면 그만큼 근사했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많이 팔려서 2쇄가 나오게 되면 그림을 좀 더 디테일하게 수정한 후 표지로 넣어도 괜찮겠다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천성이 오바다 보니까, 저렇게 스캐니메이션을 전면에 둔 표지를 사용하면 띠지를 표지 위아래로 슬라이드 하는 기계도 하나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알리에서 부품을 주문해서 대당 15만 원 선에서 만들 수 있겠더라구요. 그걸 교보나 영풍 같은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 설치를 하면 주목을 좀 받겠다 싶었죠. 하지만... 인쇄소 측에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아세테이트 지로 띠지를 만들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편의점 도시락 띠지 같은 얇은 PVC는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흐물거려서 쓸 수가 없고, 아세테이트 지는 접을 수가 없어서요.
결국 제3안이었던, 노을 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영화 속 등장인물이 출연하는 디자인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띠지 대신 부록으로 책갈피를 제공하고, 스캐니메이션은 책 속 빈 공간에 싣어서 분위기 환기용으로 쓰기로 했어요. 이렇게 해서 표지 최종 디자인이 나온 것이 6월 8일. 이제 예상 출고날짜인 6월 20일에 맞춰 홍보 및 보도자료 만드는 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덧 1. 발간 이후에 어느 독자 분이 교보문고 웹사이트에 남겨주신 리뷰, "출판사 이름 '위시라이프'와 책 제목 '영화처럼 산다면야'의 궁합은 대체 뭡니까!". 헐, 대박, 마치 <유주얼 서스펙트> 마지막에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 이 제목을 후보로 올렸던 편집장 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던 거였어요.
덧 2, 출간기념회에 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음향에 문제가 많았음에도 온라인에서 자리를 빛내주신 분들께도 감사와 사과를 드립니다. 다음번에 또 하게 되면 반드시 자막 전문 속기사를 확보해서 우발상황에 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ㅠㅠ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진행을 해주신 폴폴 작가님, 빅 땡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