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에서 못다 한 이야기 #6
대학 신입생 때 학생회관 옥상부터 길게 늘어진 커다란 현수막에 쓰인 글귀를 보고 의아해한 적이 있습니다.
투쟁할 때 나는 자유롭다
아니, 자유는 개뿔. 안 그래도 살 떨리게 무서운 교문집회며 가두투쟁을 선배들 눈치 때문에 억지로 나가고 있구먼. 그게 무슨 자유? 거기 안 끼면 왠지 집단에서 소외될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게 어떻게 자유? 도대체 언제까지 투쟁하는 건데? 좋은 세상이 어느 세월에 올 줄 알고? 아직도 우린 서슬 퍼런 군사정권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바로 며칠 전에 3당이 야합해서 여소야대 정국도 지들 멋대로 다 부숴버리고 말았는데. 이 거지 같은 세상이 언제 끝날 줄 알고 투쟁할 때 자유롭다고 하는 건지.
그로부터 강산이 세 번 반 바뀌었고, 두 번의 대통령 탄핵과 한 번의 계엄령 철폐를 하는 등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습니다. 교사가 학생을 마음껏 폭행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말대답한다고 회사에서 쪼인트 안 까이고, 여성 회사원이 제일 먼저 출근해서 책상 닦고 커피를 끓이는 직장문화도 많이 사그라든 것 같긴 해요. 전반적인 시민의식의 성숙에 가장 많이 기인했겠지만, 투쟁할 때 비로소 자유롭다고 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세상의 변화에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고 하긴 힘들겠죠. 비록 당시 3당 야합을 했던 정당은 탄핵된 대통령을 두 번 배출하고도 여전히 33%가 넘는 지지율을 얻고 있고, 또 그때 그 현수막을 달았던 사람이 지금은 중대재해처벌법 반대에 앞장서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그렇게 잊고 살다가,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경제적 자유'라는 단어를 보고 35년 전 그 장면이 확 하고 다시 떠올랐습니다. '경제적 자유'라니. 영어로 'Economic Freedom'이라고 하면 공권력이나 다른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노동을 통해 가처분소득을 만든다든지 자산을 거래한다든지 하는 걸 의미하는 것 어닌가요? 그런데, 한국의 '경제적 자유'란 그보다 금융 거래나 투자소득을 통해서 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계유지가 가능한 상태, 곧 Financial Independance, Retire Early를 말하는 거였던 거죠. 쉽게 말해서 일하지 않고도 돈 걱정 없이 소비하면서 살 수 있는 상태. 그런데 굳이 '자유'라는 단어가 거기 붙어 있는 게, 왜 전혀 생경하지 않은 거지? 왜 '자유'라는 단어가 '투쟁'이라는 단어보다 '경제'라는 단어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 거지? 하는 의문은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만... 사실 답을 알고는 있었죠. 지금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지긋지긋하기 때문이겠죠.
여기서 이제는 초딩들도 잘 안 믿는 이야기 한 토막
어느 은퇴한 사업가가 한가로이 해변을 거닐다가 생선 두 마리 달랑 들고 일찍 퇴근하는 어부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 아니, 벌써 퇴근하시는 거예요?
- 네, 오늘 먹을 분은 충분히 잡았습니다.
- ㅎㅎ. 아직 한 낮인데, 시간이 날 때 좀 더 넉넉히 잡으면 좋지 않겠소?
- ㅇㅇ? 그래서 뭐 하게요?
- 뭘 하다뇨?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벌고, 그럼 좀 더 큰 배를 살 수 있잖아요.
- 큰 배로 뭘 하나요?
- 아니, 이 양반이, 큰 배가 있으면 넓은 바다에서 고기를 훨씬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텐데...
- 그래서요?
- 고기를 더 많이 팔아서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부자가 되겠죠.
- 그러면요?
- 그럼 나처럼 이렇게 은퇴 후에 편안하게 해변을 거닐 수 있지 않겠소?
- 나 지금 그러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지적하다시피 이 낭만적인 이야기에는 삶의 불확실성이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만일 날씨가 안 좋아서 배를 못 띄우면?", "다쳐서 몇 달간 일을 못 나가면?", "물고기가 씨가 마르면?" 뭐 이런 거 말이죠. 일 하다가 다쳤다고 해서 애들을 쌩으로 굶길 수 있나요? 그러니까 그물에 걸려 손을 다쳤을 때에도, 동명이가 어이없이 떠났을 때에도, 관식이는 다음 날 또 묵묵하게 배를 타야 했던 거잖아요. 애초에 저런 수렵 / 채집활동만으로 안정적인 생계유지가 되었다면, 잉여생산물을 비축하는 농경사회도 인류역사에 도래하지 않았을 테고, 또 이런 시장경제 체제도 정립되지 않았겠죠. 그리고,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의외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험을 사고, 돈 걱정을 하고, 노후걱정을 하고 삽니다. 그런 걱정이 죄다 금융기관 들만 배 불리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악착같이 여윳돈을 모으려고 하는 거겠죠 (수정자본주의니 북유럽식 복지제도 같은 건 여기선 논의를 미룹니다).
그래요. 미래에 대한 불안 - 병원비, 노후, 자식 교육 걱정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 경제적 자유라고 한다고 치자구요. 물론 납세자이자 공공기금 조성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서, 저런 걱정은 입법, 행정기구에서 당연히 대리해줘야 한다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그런 건 일단 미뤄두자구요, 근데 다 떠나서, 이런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모아야 하는 걸까요? 캐나다에서는 개인연금 상품을 팔기 위해 은행마다 정해둔 기준 같은 게 있으니, 한국 사회에서도 당연히 딱 정해둔 게 있을 겁니다. 은퇴 직전 수준의 생활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월 얼마 정도 은퇴소득이 필요하니까 지금부터 매월 얼마 정도 모아야 한다고 말이죠. 근데, 이 금액이... 정말 상상 외로 너무 많더라구요. 고위험도 금융상품에 손을 대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노후의 경제적 자유를 위해 지금 현재 소비의 자유를 꽁꽁 묶어야 할 만큼 말이죠. 이렇게 되면 괜히 부아가 터집니다. 아놔.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사실과 다릅니다), 왜 나는 지금 딸랑 요것밖에 못 버나.. 하고 말이에요. 젠장,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었으면, 그간 성실히 살아온 (사실과 다릅니다) 이민자는 노후에 굶어 죽게 되는 건지.. 하면서 말이에요.
근데 문제는, 이런 분노와 비관의 원인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라는 거죠. 문자 그대로 걱정을 위한 걱정 때문에 분노를 하는 셈입니다. 좋은 대학 못 가면 인생이 망할 거라는 걱정 때문에 학생의 시험성적이 안 좋으면 그렇게 두들겨 패댔던 선생들처럼요. 인생의 의외성과 불확실성 때문에 시작된 걱정, 그런데 그 걱정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확실하게 노오력을 통한 경제적 자유라는 하나의 길로 정해져 있다는 가설은 왠지 상호모순되어 있는 걸로 보이지 않나요? 모든 걸 떠나서, 이러다 보면 우리의 삶의 의미가 뭔지 잊어버리게 되잖아요. 우리가 정말이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노후 걱정을 덜 하기 위해서 태어난 건 아니라는 거죠. 남들보다 더 오래 살면서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태어난 건 더더욱 아니고요.
우리는 왜 사는 걸까요?
어릴 적에는 모두 각자 꿈이 있고, 그 꿈을 좇는 삶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노동자 해방을 위한 꿈이 되었든, 얼렁 돈 벌어서 울 엄마, 아빠한테 신축 아파트 한 채 사드리고 싶은 꿈이든,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은 꿈이든지 말이에요. 내 삶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 한 점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는 것이 열심히 사는 거라고 믿었었죠. 그런데 어느 날, 턱 하고 뭔가 막히면서, 제게 한번 더 생각할 여유가 생기더라구요. 내가 간직했던 그 꿈은, 과연 뭘 위한 꿈이었나... 하면서. 내 주변의 아픔에 한번 눈길을 줄 여유도 없이 냅다 질주만 해서 얻은 꿈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하면서.
지금 당장 한번 생각해 보자구요. 최근에 내가 가장 많이 웃고, 즐거워하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그 장면을 기억하면 아직도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순간에 대해, 그리고 그때 내 감정은 어떤 거였는지.
친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서 시시한 농담을 하며 웃어대든지, TV에서 두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서 손에 땀을 쥐며 흥분을 하든지, 몇 달간의 고생 끝에 단편 영화 하나를 만들어 내든지, 만기가 가까운 적금통장을 바라보든지, 갖고 싶어 하던 카메라를 장만하든지, 좋아하는 사람과 살을 부비고 섹스를 하든지, 책을 읽다가 잠시 덮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든지 했던 순간에 느끼던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그게, 행복 아니었을까요?
행복이라는 지상 최대의 목적하에서는, 꿈이 되었든, 돈이 되었든, 현실이 되었든, 다 그냥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왕 신해철은 어느 강연회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요? 유기체인 호모사피엔스 개인으로서 인생의 목적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목적을 달성한 상태라고.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인생은 신께서 우리에게 선사한 보너스 게임 같은 거라고. 상대를 더 많이 쓰러뜨리고, 더 많이 버찌를 모으는 게임이 아니라, 오직 행복해지기 위한 게임이라고.
지난 5.1 방송에서, 폴폴 작가님의 질문 - "만일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실 건가요?"에 대한 대답을 하고 나서, "근데... 이 정도 살고 보니까, 무슨 선택을 하든지,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더라구요."라는 첨언의 의미는 이런 거였어요. 내가 만일 큰 집에서 살고, 매일 번갈아 운전할 수 있는 고급차를 여러 대 가지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큰 행복이라고 한다면, 30년 전의 선택에 따라서 지금의 내 삶이 달라진 거겠죠 (청소랑 운전을 싫어하지만). 남들에게 계속 이기고 또 이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지금쯤 엄청난 부자가 되어야만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같이 식사를 하고, 나란히 걷고, 머리를 맞대고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당신의 행복이라고 한다면요. 내 집이 커봤자 머리 맞대고 누울 수 있는 자리가 더 필요한 게 아니고, 차가 많다고 해서 산책하는 동안 차를 밀고 다닐 것도 아니잖아요. 실제로 제 주변 지인 중 이민 초기에 저와 다른 선택을 해서 본인 적성에 맞는 일을 하시며 고소득을 올리시는 분이 있는데, 막상 보면 우리 집보다 훨씬 큰 집에 살고는 계시더라도 그 분 역시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부분은 저와 같단 말이죠. 어쩌면 상업영화 현장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과 같이 만드는 것보다, 내가 생각한 이야기를 인터넷에 글로 올리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팟캐스트를 깔깔거리면서 같이 만드는 삶이, 제가 생각하는 영화처럼 사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잖아요.
만화 <20세기 소년>의 칸나 엄마처럼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행복해져라."라는 강요를 하고 싶은 건 아니예요. 드라마 <연애시대>의 목사님처럼 "행복해지는 게 그렇게 만만해 보입니까?"라고 야단치고 싶지도 않고요. 그렇게 행복마저 노오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고 한다면 너무 서글프잖아요. 그냥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더 가깝게 주변을 살피면 얼마든지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자주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상상해 본다면, 우리가 어떨 때 행복해질 수 있을지 알게 되는 거 아닐까요? 이번 주말 공개될 추가 방송에서 사랑교 교주이신 이연 작가님은 이런 설법을 펼치십니다. "사랑도 근육 같아서 자꾸 안 쓰면 퇴화되는 것 같다." 그 리듬을 그대로 받아서, 저도 이런 말로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행복에 대한 감수성도 미각과 같아서, 자주 안 쓰면 행복을 만끽하기 어려워진다."
南으로 窓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여기에 적어놓은 대로 살고 있다는 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하루에 제대로 일하는 시간은 2시간 내외인 널럴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마저 하기 싫어서 복권을 삽니다. 재정적 여유가 날 더 유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를... 머리로는 믿지는 않지만 심정적으로 지지를 해요. 캠핑이나 어떤 유흥을 즐기더라도 슬슬, 그 순간순간을 만끽하기보다는, 목표를 정하고 방법을 만들어서 성과를 올리기를 원합니다. 팟캐스트 녹음을 할 때에도,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보다, 미리 계획해 둔 할 말만 딱딱 잘 정리해서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내 실생활이 이렇게까지 분열적인 경우가 있을까요?. 그러니 놀면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죠. 그런 뜻이었을까요, 투쟁할 때 자유롭다는 뜻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나의 행동이 일치할 때의 떳떳함. 아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긴가민가하던 사람들에게 건네는 독려. 그럼 전, “자잘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때 나는 자유롭다.”라고 해야 할라나요?
녹음은 쉬고 있지만, 인터뷰 파일이나 낭독 파일들, 그리고 각 에피소드의 풀버전이 천천히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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