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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아빠 Apr 13. 2022

노 키즈 존에 대한 단상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아이들 학교에 새로운 교장이 부임해 왔다.

이곳에서 근무했던 추억을 못 잊어, 교직의 마지막 1년을 이곳에서 보내고 퇴직하겠노라

자원해서 부임해왔다고 하는데 신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서야 그분을 처음 뵙게 되었다.

따로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교감 두 명을 좌우에, 부장들을 뒤에 거느리고 걸어오는 깡마른 몸에 날카로운 눈매의 노부인이 교장임을 직감했다.

교장선생님은 웃으며 우리 아이들에게 다가와 "귀여운 것들" 하시더니 대뜸 끌어안고 엉덩이를 두들겨 주고는 휙- 가 버리셨다.

처음 보는 할머니가 자기 이름도 묻지 않고,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끌어안고는 엉덩이를 두들기고 가 버리자 아이들은 엉거주춤 서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교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게 물었다.

"아빠 저 할머니는 누구야?"

실소하는 한편 속으로 문득 생각했다.

'아.. 저분은 아이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구나'

(과연 한달 뒤 개인적인 대화에서 그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저능아같아서 너무 너무 싫은감정이 생긴다고 말했다.)

흔한 일이라 딱히 부정적인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정치인들도 선거철만 되면 아이들을 소품 삼아 사진을 찍어대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가.

아이들을 위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아이들을 소비하고 있는 이런 모습이 흔한 이유는 아이들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류의 대우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자신의 이기심을 채울뿐, 어린이에 대한 악의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느 유명한 투자자의 저서를 보면 저자는 편향을 이겨내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데, 다른 챕터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지론을 서술하던 중 자신이 식당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옆 테이블에서 남자아이 둘이 쉴 새 없이 장난을 치고 떠들어 대는 것을 참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부모가 진땀을 빼며 애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문제는 평소의 가정교육이 제대로 선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내 아이라면 가만히 두지 않았을 일이다."

딸 하나를 키워 본 경험으로 아들 둘을 키우는 부모를 재단해버린 이 짧은 일화는 작가가 내내 장문으로 강조한 이야기들에 대한 신뢰도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아이에 관한 사람들의 견해를 보면 대개 편향적이다. 

오직 주관적인 잣대와 경험으로만 이야기한다.

애 하나인 사람은 애 둘인 사람을, 기질이 순한 아이 부모는 기질이 강한 아이의 행동을, 딸  부모, 아들 부모는 서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다.

굳이 알 필요까지는 없으니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르는 대로 두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들 하지 않는다.

애를 키워 본 사람들끼리도 그러니 안 키워 본 사람들은 더 하다.

그 끝에 맘충이란 단어를 만들어 혐오를 감추지 않는 모습들이 있다.

혐오는 급격히 자라나 기괴한 장소를 만들어 냈다.

노 키즈 존이다.

한 음식평론가는 노 키즈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서비스라는 기본 업무에 대한 예상 및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무능한 데다가 유리멘탈'이기까지 한 실무자가 사회적으로 가장 만만한 요인을 선제공격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편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그 말이 내게 와 닿은것은 내가 접한 노키즈 존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불편함'이 모두 사라져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다 형편없는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어떤 업장은 치명적인 실수에 대해 뻔히 보이는 거짓말들로 변명만 거듭한 곳도 있었다.


노키즈존이 처음 회자되기 시작한 건 2014년 중순즈음이다.

그 무렵 나는 첫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 가게에서 알바를 하던 홀 서버는 아이를 대동한 손님이 들어오거나 애들이 밥을 먹고 난 자리를 치울 때..아니.. 애가 침을 흘리며 옹알거리거나 침을 가르릉  거리며 까르르 웃기만 해도

차마 듣기 힘든 증오의 언어를 토해냈다.

그 무렵엔 나 역시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미숙한 존재고 우리는 미숙함을 함께 분담해야 할 사회 구성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해고하기 전까지 나는 때마다 그에게 증오의 발언을 자제할 것을 요구 했다.

그러면 그는 살짝 얼굴을 붉히곤 "알잖아요~애가 아니라 부모가 문제"라며 증오의 대상을 급전환했다.


노키즈존을 둘러싼 온라인상의 논쟁 역시 같은 양상이다.

실질적으로 배격되는 주체는 아이인데 마치 배격의 주체가 부모인 것처럼 위장한다.

"애는 그럴 수 있는데 부모는 그러면 안돼"

"부모가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자신의 아이를 훈육해도 경찰이 출동하고 법적 처벌을 받고 대화와 이해로 양육을 권장하는 시대에 "엄격한 교육"을 논하는 이들도 있다.

엄격의 엄()과 같은 말은 혹독(酷毒)이다.

배려라는 명목으로 학대를 정당화 하라는 말에 다름아니다.

"부모가 문제야!"

그래. 물론 그럴 것 같은 부모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극소수에 불과하다.

부모는 항상 자식에 관한 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

얼핏 이성적이고 논리적임을 주장하는 그 언어들의 이면엔 몰상식과 몰이해가 깔려 있다.

이런 언어들은 사실'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대상을 배격하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다.


인간은 공장에서 찍어 낸 규격품이 아니라

어린이들도 모두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기질이 다르다.

인간은 지구 상의 생물 중 성체로 자라나는데 십 년 이상이란 장구한 시간이 걸리는 유일한 동물이라,

 "교육"이란 걸 태어난 지 몇 해 되지도 않은 아이에게 앉은자리에서 강제로 끝없이 반복 주입해서 단시간 안에 이뤄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아동학대다)

<감정>이란, 도구가 아니라 사용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조차도 자기 감정의 사용법을 모르는..아니 실체조차  모르는경우가 다반사가 아닌가!

어린이는 시간에 따라 성격과 상태가 변하므로 한 시간, 한 달, 한해 전에 나쁜 행동을 일삼던 아이가

한 시간, 한 달, 한해 뒤에는 더없이 바른 아이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들은 원래 미숙한 존재다.

그 모습을 비난하고 아이를 배격하는 이들 모두 어린 시절이 있었다.

기억하기론 노 키즈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유아기를 보내던 시대에는 이런 낯 뜨겁고 폭력적인 차별만큼 전혀 없었다.

통념이 만들어 낸 사회적 보호망 안에서 성인으로 자라났다.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노 키즈존을 만든 세대가

'꼰대'라고 멸시해 온 세대들은 그래도 미래세대의 구성원들이 만들어 내는 불편함을 웃으며 감내해 왔다.

최소한 멸시하거나 배격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특성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한 배려였으며,

한때 미숙하고 민폐를 끼치는 존재로 살아왔던 세월에 대한 배상이자,

사회적  책임의 이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연적 순리를 기반으로 전승되던 배려와 책임은,

어떤 방면에서도 오직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편취하고자 하는 욕망'을 빌미로 냉혹하게 단절됐다.

결국 노 키즈존이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은 회피하고 권리만 주장하겠다는 극한의 이기심의 표출이자,

사회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향한 역겹고 파렴치한 폭력의 다른 말이다.

노키즈 존의 당위에 대한 주장자체가 반사회적인 이유다.


세상에는 연령과 성별과 인종과 국가를 막론하고 다양한 인간 유형이 존재한다.

그런데 상대에게 폐를 끼친다는 이유로 배격되는 유일한 대상은  오직 아이뿐이다.

어떤 누구도 <노십대존>이나 <노아줌마 존> , <노 아저씨 존>을 논의하지도 않는다.

그런 장소가 실존했던 적은 있다.

인종차별이 횡행하던 시대에 <노 흑인 존>이나 <노 인디언 존> 같은 장소다.

세월을 격하고 이제 다시 차별이 횡행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파렴치한 차별이, 취향이란 역겨운 이름으로 위장해 노 키즈 존이란 이름으로 부활했다.

그래서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노 키즈 존을 약자에 대한 차별로  판결했다.


내 생각에 노 키즈존이란 업주와 손님 각각의 이기심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곡선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생겨났다.

'계층을 가려서 받을 권리'는 언어 자체로 기만적이다.

그런 반사회적인 행위에 대해 인정해 줄 '권리'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손님을 가려서 받을 권리'는 있다.

극소수의 무례한 손님에 대한 증오를 어린이라는 계층에게 돌리곤 '선택' 혹은 '취향' 이라는 위선적이고 낯 뜨거운 말과 차별행위보다는

극소수의 무례한 당사자들에게 "손님 나가세요." , "안돼요, 안 팔아요" 이런 말을 하고 쫓아 버리는 게 맞다.



노키즈존, 낮시간동안의 층간소음등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어떤 아량도 베풀지 않는다.

말과 관계를 배우기 시작한 시점부터 날선 시선들을 견뎌야 하고,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순간부터 하루종일 "안돼!"라는 부정의 말을 들어야 하는 사회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결코 노인을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꼰대라는 단어로 멸시 당하고 '라떼는' 이란 표현으로 비웃음 당하는것은 (인류가 포노사피엔스로 진화한것 때문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주었던 혐오를 이제부터 돌려받기 시작한것일지도 모른다.

늙어서 약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할 일이다.

아이를 위한 나라가 없었으면

노인을 위한 나라 또한 하지 않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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