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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맛 교향곡 May 23. 2020

무엇이 삶을 의미있게 하는가-[숨결이 바람될때]를 읽고

1. 공통된 경험으로서의 죽음

세상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에 만인에게 공통되는 경험은 극히 드물다. 그중 유일하게 계층과 성별, 그리고 심지어 시대를 불문하고 만인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은 태어남과 죽음이다. 하지만 이 두 경험들은 언급됨이 드물다. 전자는 그 경험을 나누기에는 너무나 먼 예전의 일이기 때문에 망각과 마주했기 때문이고, 후자는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는 이미 타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후자는 사회적으로 건강한 대화의 주제로서 다루어지지는 않는다. 죽음은 으래 슬픔, 모든 것의 끝, 허무함 등으로 연결되며 이는 화자에게 본능적으로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는 죽음 그 자체를 겸허하고 차분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공포와 그로부터 연유하는 삶의 의미는 놓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될 때]는 임박한 죽음 앞에 놓인 삶의 의미와 그 소중함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좋은 책이었다.


2. 가정적 경험으로서의 죽음

독서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이 보고 느껴보지 못한 것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시켜 준다는 것이다. 가끔 나는 자신이 바로 내일, 혹은 가까운 미래에 죽을 운명에 처한다면 어떠하겠냐는 생각을 한다. 첫째로는 학교만 다니며 더 많은 경험을 해 보지 못한채 끝나버리는 인생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에 치밀 것이고,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두 번째로 느끼는 감정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이후 어쩌면 나의 예상이 보기좋게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 폴 칼라니티가 나보다 수십배는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며, 엄청난 노력을 퍼부어 도달한 정상에 이르러서야 죽음에 직면하고, 거기서 나와는 전혀 다른 고찰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학부를 스탠퍼드에서 졸업하고 케임브릿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예일대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무릇 산 정상의 경치는 그것을 밟아본 자 만이 올곧게 묘사할 수 있다. 그는 신경외과의가 되기로 결정한 일련의 과정을 일종의 운명(calling)이라고 표현한다. 의사인 아버지를 보며, 그리고 그의 문학적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하여 고민하고자 했다. 그는 그 바람을 이룰 가장 의미 있는 수단이 신경외과의사로서의 삶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의 존부를 논하며 유물론적 관점에서 뇌 과학을 중시했지만, 결코 전통적 의미에서의 영혼과 자아를 놓쳐버리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문학도로서의 그는 “[죽음]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그것과 직접 접촉하며 경험하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43쪽)라는”경험론적인 관점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에게 내려진 “처방”은 치명적이 폐암. 처음부터 죽음을 더 잘 알기 위해 고된 노력을 겪어온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하면서도 자비로운 운명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신과의 직면은 저자로 하여금 그가 의사가 된 목적 달성에 더 가깝게 해 주었다. 그는 의사로서의 생활이 자신에게 죽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주지는 않았으며, “마치 별들을 연구하기 위해 태양을 직접 바라보는 것처럼, [죽음을 알기 위해 환자들의 죽음과 항상 함께하는 것은] 진정한 죽음의 의미에 무지하게 하였다”(81쪽)고 고백한다. 이것은 아마추어 법학도로서의 내가 판례의 세세한 기준과 문구에 매몰되어 그 뒤에 함유된 사람들의 애환과 분쟁을 해결하려는 책임에 둔감해진 것과 같다.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더 잘 하려고, 더 자세히 신경 쓰려고 할수록 결과론적으로 더 둔감해지며 무지해진다는 것을. 수술실에서 타인의 죽음을 목도할수록 죽음의 타인성은 더 강해질 뿐이어서 그것을 진실되게 이해하는 것과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라는 것을.


죽음앞에선 그는 한없이 인간적이었다. 점점 병이 악화됨에 따라 그는 더 이상 수술을 집도할 수도 없었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글을 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는 결코 초인적인 용기로 지독한 고통을 고통스럽지 않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힘들 때마다 울었고, 새로이 태어난 딸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었으며, 잠시나마 희망에 차기도 하였다. 그가 위대한 것은 죽음을 아무런 공포 없이 두 팔 벌려 환영해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죽음을 마주한 감정과 생각을 오롯히 느끼며 직시하였다는 점이다.


내가 만약 죽음을 가까운 미래에 마주한다면 폴 칼라니티처럼 나 스스로에 대하여 고찰할 수 있을까. 죽음마저도 자신의 정신적 고양에 사용할 수 있을까. 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떠나가게 될 세상에 무엇인가를 남길 수 있을까.


3. 개인적 경험으로서의 죽음

2019년 9월 26일. 나를 끔찍하게 아끼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그녀를 바다할머니라 불렀다. 영덕의 바닷가에서 사셨던 할머니는 자택에서 추석 연휴에 쓰러지셨고 발견되어 입원 후 퇴원하신 다음 서울의 우리 집에서 요양 중이셨다. 추석이 끝나고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말을 엄마로부터 전해 들었을 당시 변호사시험공부로 바쁜 와중에 할머니를 문안 갈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퇴원하셨고 괜찮을 것이라는 엄마와 의사선생님의 말을 믿고 마지막으로 직접 뵐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렸다. 변호사시험 이후에 실컷 이야기를 들어드리면 되지라는 안일한 심산에서였다. 그렇게 불효막심한 손자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보잘것없고 미천한 공부를 하는 와중, 할머니는 그로부터 3일 후 돌아가셨다.


아마 나는 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분명 나는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육성을 들을 수 있었고, 비록 자주는 뵙지 못하지만 키워주신 그 높은 사랑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그리고 나 또한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입으로 말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가 알량하고 작은 공부 따위를 위해 놓쳐버린 것이다.

이후 장례식에서 영정을 들며 나는 죄책감도 함께 들었다.


할머니,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


4. 죽음을 마주하며

삶은 그것이 언제라도 끝날 수 있음을 앎으로써 달콤해진다. 매일 하루하루는 축복이며, 우리는 단순히 삶을 “보내버리는” 것이 아닌 “살아냄”으로써 가치있게 만든다. 우리가 사신을 마주했을 때 “잠깐만요,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아있는걸요” 따위의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내가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낼 때,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생각할 때만이 죽음에 떳떳하게 맞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의 책을 통해 삶의 의미를 맺었고 담대히 끝을 맞이했다. 나 또한 나만의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나 고유의 의미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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