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미와 황금팔찌

암환자 단단이의 투병기

by 김단단

매년 초가 되면 신년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공표한다.

몇 년 전, 계획은 말로 뱉어야 이루어진다는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해 봤는데,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그 뒤로는 자연스레 연례행사가 됐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 하나가 그 모든 계획을 단숨에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김단단 씨죠? 정기 건강검진 결과 메일로 드렸는데, 확인하셨나요? 좌측 유방 악성종양 의심 소견이 있습니다.”

마치 드라마 대사처럼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말했다.

모든 암 환자들이 그렇듯, 처음 며칠은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와 같이 신파적인 생각도 해 보았다.

문득 수년 전, 홈쇼핑에서 보험상품 MD 업무를 할 때 암보험 방송 큐시트에 늘 적었던 멘트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여성 세 명 중 한 명은 암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세 명 중 한 명이 내가 될 줄이야. 경품 추첨은 단 한 번도 걸린 적 없던 내가, 이런 데서 당첨이라니.

분하고 억울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니 ‘내가 또 뭐라고 이런 일을 피해 가겠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내 가장 친한 친구는 울면서 말했다.

“암 진단이 김단단의 새해 계획에는 없었단 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속으로 펑펑 울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두 달간의 휴직에 들어갔다.

휴직기간에도 아침 알람에 길들여진 나의 뇌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충직했다. 6시면 눈이 번쩍 떠졌고, 집안에서도 분주히 할 일을 찾았다.

일개미의 삶이란… 멍석을 깔아줘도 제대로 놀 줄도 모른다.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쉬는 것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낮에 시간이 생기니 평소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가 볼 수 있었다.

백화점, 미술관과 전시회장. 평일 낮임에도 그곳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에휴, 회사는 나만 다녔네, 나만 다녔어...'


그리고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만났다. 퇴직한 선배들, 사업하는 친구들, 전업주부 친구들… 회사에 매여 있던 나와는 달리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내가 다른 삶을 택했더라면, 암에도 걸리지 않았고 저렇게 여유로웠을까?'

억지 같지만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들이 억울하기도 하고 후회도 됐다.


‘아니야, 절대 나는 불쌍해질 수 없어.’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 주눅 들 만큼 화려한 명품 매장 앞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불쌍한 일개미인 나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 줄까?'

매장에 들어서며 '분명 작은 선물이라고 했다. 큰 건 안 돼.'라고 다짐했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영롱한 주얼리들을 보자 심장이 뛰었고, 베테랑 셀러의 말솜씨에 귀가 아기코끼리 덤보처럼 날갯짓을 했다.


매장을 나설 때, 셀러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미소를 보냈고, 내 팔목은 번쩍거리고 있었다.

카드 대금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어쨌든 억울함이 다소 씻겨 내려간 듯했다. 아니, 씻겨 내려갔어야 했다.


번쩍이는 팔목을 보며 생각했다.

내팽개쳐 둔 새해 계획을 다시 써야지.

첫 줄은 ‘팔찌 구매 대금 상환’이라 적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