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전시에서 출발한 물음
이 글은 2019년에 다녀온 「수집에 집착하면 건강에 이로울까? (기획:남미혜)」 전시에서 출발한다.
전시 제목에 이끌려 갤러리를 방문했다. '수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여러 작가의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장 한쪽 벽을 식물 표본으로 가득 채운 취운 작가님의 작업이 시선을 끌었다. 하나씩 보면 얼핏 평범해 보이는 식물 표본이지만 채집 일시와 구체적인 채집 장소까지 메모해서 배열하니 질서 있고 아름다웠다. 이 작업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런 것들도 작품이 될 수 있으려나 의심했겠지만, 이걸 보고 나니 당연히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하게 설득이 되었고 머쓱할 만큼이나 신선했다.
나도 어설프게나마 이것저것 수집을 해오고 있었다.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도 수집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지구 반대편을 여행하고 가져온 영수증이나 뮤지엄 티켓, 전망대 입장권, 미술관 브로셔 등. 버리지 않고 상자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양이 점점 늘어나자 클리어 파일에 시간 순서대로 배열했다. 파일로 대여섯 권이 나왔다. 그것 말고도 다양했다. 전시를 보고 받아온 안내 브로셔, 영화 티켓이나 팜플렛, 심지어 집회 피켓도 있었다. 특히 집회 피켓은 정치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중요한 사료 아닌가. 전시를 다녀온 후기나 영화 리뷰를 쓰지 않아도, 집회에서 발언을 하지 않아도 기념품을 파일에 꽂으면 나의 경험을 잘 갈무리해서 저장하는 기분이 들었다. 갤러리를 거닐고 영화를 본 시간이, 광장에 앉아있던 시간이 빳빳한 종이 한 장에 그럴듯하게 담겼다. 수백 년 후의 인류에게도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있다면 나의 수집품들도 전시될 수 있으려나- 잠시 상상은 했지만 목적의식은 없었다. 전시를 기획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목적도 없이 수집을 하게 된 걸까?
아주 오래전, 푸딩을 먹은 그 날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지는 미국 서부였다. 부모의 전송을 받으며 첫 해외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에게는 인천국제공항에 집합하는 것부터 흥미로운 모험 시작이다. 우리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시작해서 몇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기나긴 로드트립에 몸을 실었다. 식사시간이 되자 버스는 우리를 뷔페식 레스토랑에 내려주었다. 바로 이곳에서 내 인생 가장 강렬한 디저트를 만난다. 조금 큰 규모의 뷔페였다. 서양인들도 꽤 많았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코너로 향했다. 커다란 트레이가 여럿 있었다. 그중 어떤 트레이에 걸쭉한 크림색 무스가 가득 깔려있었다. 푸딩이라 적혀있었다. 이게 푸딩이라고? 한국에서 보던 탱글탱글한 푸딩의 형체와 사뭇 달랐다. 푸딩을 한 스쿱 떠서 덜어와 자리에 앉았다. 달콤한 무스 푸딩을 입에 넣는 순간 내가 갑자기 아주 낯선 곳에 와 있다는 생각이 깊숙한 곳에서 솟구쳤다. 입안에 퍼지는 푸딩 맛을 느끼는데 갑자기 이 세계가 너무 거대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 광막한 세계에 헤아릴 수 없이 기나긴 역사가 흘러왔고, 내가 평생을 보고 듣고 읽어도 다 경험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일들이 있다는 것. 그 예고편을 잠시 엿본 듯했다. 푸딩은 갑자기 새로운 땅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이런 크림 같은 푸딩을 먹으며 살았는데 나는 이걸 태어나서 처음 보고 있다니. 먼 나라에 와서 푸딩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낯설었고 경이로웠다.
만약 지금 이렇게 흥미로운 체험을 했더라면 나는 아이폰에 메모라도 남겼을 거다. 인스타에 올리고 트윗도 썼겠지. 당시에는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 나이 때엔 기록해두지 않아서 아쉬웠던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중대한 푸딩을 먹었는데도 기록 남기지 않았다. 영영 그 레스토랑이 어딘지 알 수 없게 되었다. 2010년 초, 한국의 고등학생 1백 명이 우르르 들렀다 간 애리조나 주의 어떤 레스토랑. 이게 내가 그곳에 대해 아는 전부이다. 사실 미지의 장소로 남겨두는 편이 더 흥미롭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구글맵에서 이 레스토랑을 검색하고, 로드뷰와 이미지를 확인하고, 리뷰를 읽으며 내 기억과 일치시키고 싶다. 홀로 그 여행지를 다시 찾아가서 같은 푸딩을 다시 맛보는 상상을 한다. 그 후로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소소한 티켓이나 영수증을 일단 버리지 않고 그냥 두었다. 언제 무엇을 추억하고 싶을지 모르니까. 버리지 않다 보니 관성적으로 계속 모았다.
이제는 세상이 변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날짜와 위치정보가 함께 저장되니까 잊으래야 잊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한번 시작한 수집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이걸로 뭘 할 것도 아닌데 말이다. 수집품이 작품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편견이 있었다. 누가 보아도 의미 있는 물건이거나, 아주 오래된 역사적 물건이어야 할 것 같았다. 그도 아니라면 수집자가 유명한 사람이거나. 내 수집품들은 소박하다. 역사적인 물건이 되려면 세월이 더 흘러야 하고 나는 유명인이 아니다. 하지만 「수집에 집착하면 건강에 이로울까?」 에서는 보란 듯이 수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수집이 작품이 되려면 어떤 기획의도를 갖고 어떻게 배치했는지가 중요한 것 같았다.
이 전시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을 넘어, 전시 제목을 통해 그게 건강에 이로울지 까지 묻는다. 이 질문은 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수집은 나한테 이로울까? 전시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검색하면 이제 AI가 가장 먼저 나서서 답변해 준다. 읽어보면 아마 건강에는 이롭지 않은 모양이다.
수집의 근원에는 불안이 있다. 인간이 잘 때 빼고 항상 느끼는 유일한 감정이 불안이라고 한다.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뭐든 쌓아나가려는 마음에서 식량도 쌓고 돈도 쌓고 경력도 쌓고 인맥도 쌓고 업적도 쌓고.. 수집품도 쌓는다. 수집하는 사람은 권력가이다. 물건을 나만의 분류 기준에 따라 모은다. 내키면 수집품의 목록도 만든다. 때로는 처분한다. 보다 현대의 수집가는 바탕화면에 폴더를 만들어서 파일을 분류하고 수집한다. 인스타그램 바이오에 여행 간 나라 국기들을 차례로 수집해서 보여주는 계정도 많다. 불안은 기본값이고, 경험을 배치하고 싶다는 욕망은 보편적이다. 푸딩 먹은 곳을 놓치고도 아쉽지 않았더라면 수집을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미련이나 사소한 결핍이 모여 수집으로 이어진다.
한동안 열심히 모으던 수집품들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모두 버렸다. 애초에 제대로 기획한 것이 아니었으니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나 최후의 보루인 책만큼은 남겨두었다. 내 수집은 그리하여 책으로 집약된다. 고르고 골라서 사는데도 이제 서재 한쪽 벽을 다 채우고도 넘쳐서 두 겹으로 꽂아야 한다. 책 구입은 일반적인 쇼핑과는 다르다. 아니, 그 무엇과도 다르다. 내 서재가 나를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것 없이는 나를 다 말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내가 지금까지 나눈 대화들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누고 싶은 대화의 수집품이다. 읽은 책, 읽고도 잊은 책, 읽어야 할 책, 읽으려고 꺼내둔 책, 읽었는지 잘 모르겠는 책, 일단 사둔 책, 넘기다 만 책, 시간이 된다면 언젠가 반드시 읽고 싶은 책,...
발터 벤야민은 '나의 서재 공개'에서 서재와 수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글은 수집가와 수집품의 관계에 집중한다.
수집가의 삶에는 무질서와 질서의 변증법적 긴장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 물론 이때 그가 맺는 사물과의 관계는 그 사물들이 지닌 기능가치, 즉 그것들의 실용성 내지 쓰임새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그 사물들을 그것들이 갖는 운명의 무대로서 연구하고 사랑하는 그런 관계이다. 수집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큰 매력은 하나하나의 사물들을 어떤 마력적 범주에 가두어 두는 일이다.
(중략)
책을 구입하는 일이란 결코 돈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전문적 지식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 두 요소가 구비된다고 해서 진정한 서재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서재에는 언제나 무언가 투시될 수 없고 또 동시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발터 벤야민 作, 안성환 易, 민음사 (1998). p.31-32
지퍼백에 담겨서 갤러리 벽에 걸린 나뭇잎이나 풀은 마땅한 쓰임새가 없다. 책의 쓸모는 도서관에서 찾아도 된다. 내 서재의 책들도 이미 내가 읽음으로써 기능을 다했다. 그러나 '마력적 범주'에 가두어 나만의 무대에 올라가 있다. 내일 회사에서 잡혀있는 중요한 미팅에 관한 책은 없다. 그런 이벤트는 언제든 발생하고 흐르고 지나가는 법이다. 만약 미팅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심지어 박살이 나더라도, 내 책장의 책들은 건재하다. 나의 책장만큼은 내가 '마력적 범주'에 가두어둔 공간이니까.
수집하는 나의 마음에서 권력의지가 느껴진다. 너무 손쉬운 방식으로 경험을 재산화하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조금 더 노력해서 글을 쓸 수도, 창작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단순한 수집은 하나도 수고롭지 않다. 오히려 간편하고 집착적이다. 수집되지도 않고 기록되지도 않은 것들은 어떻게 될까. 그러고 보면 여태 소중한 사진 파일들을 몇 번이나 날렸어도 큰 문제없이 잘 살아있다. 하지만 아무런 아카이브도 없다면 모든 사건은 내 머릿속에 영원히 갇히게 될 뿐이다. 그 조각들이 조금씩 모여 나를 이루고 있겠지만 일단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수집품은 안심이 된다. 비록 그것이 인간이라는 불안한 존재가 빚어낸 과도한 자아일지라도 말이다. 취운 작가의 작품처럼 의도와 통일성을 두루 갖춘 수집이라면 예술이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 작품을 본 누군가가 어린 시절 푸딩을 먹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