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의 버섯』 하지만 끝맺기를 거부하는

필연 아닌 우연의 세계

by 미소

하나의 방향으로 뻗어 나아가는 음악은 익숙하다. 흥얼흥얼 쭉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음악은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고전주의 곡은 친숙하고 통일성 있다. 그 예로, 유명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들 수 있다. 소나타 16번은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어린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배우는 곡이다. 음악은 결론을 향해 필연적으로 나아간다. 이 곡의 부제가 '쉬운 소나타'인 것은 나아가는 방향이 한눈에 알아보기 쉬워서 일지도 모르겠다. 오른손 멜로디만을 따라서 "도-미솔 시-도레도" 하고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 왼손은 차분하고 고르게 반주를 수행할 뿐이다. 양손이 빚어내는 음악, 즉 멜로디와 반주 사이에는 모종의 위계가 존재한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6번의 첫 4마디 악보. 오른손은 멜로디를 이끌고 왼손은 반주를 수행한다.




이에 반해, 바로크 시대에는 여러 성부로 이루어진 다성음악이 발달했다. 한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다른 선율이 겹쳐져서 우리를 혼란에 빠트린다. 둘 이상의 독립적인 파트가 각자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돌림노래 같기도 하고 성가대의 합창을 듣는 느낌도 든다. 각 성부는 잠시 스치는 인연처럼 저마다 자유롭게 흘러가면서 각자 존재감을 나타낸다. 바흐의 음악이 대표적이다. 2성부 인벤션 악보에서 윗 성부가 먼저 음악을 시작하고 잠시 후 아랫 성부가 자신의 순서를 이어받아 유사한 멜로디를 노래한다. 이러한 배치에서 나는 우연을 엿본다.

바흐 2성 인벤션 4번의 첫 5마디 악보. 양손에 두 개의 성부가 배치되어 있다. 둘은 서로 독립적이다.



바로크 양식 이후에 등장한 고전음악은 통일성을 목표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논의한 의미의 '진보', 즉 시간의 통일된 조율이었다. (중략) 나는 다성음악을 처음 접하면서 감상에 새로이 눈뜨게 됐다. 개별적이면서도 동시에 등장하는 멜로디들을 골라내야 했고, 또한 그 멜로디들이 함께 빚어내는 복수의 시간적 리듬과 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종류의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세계 끝의 버섯』 p. 59



세상은 진보한다고 배웠다. 기승전결에 따라 뻗어나간다는 관점은 익숙하다. 혹은 세상이 퇴보하고 있다고 정의하더라도, 그 또한 어딘가로 향한다. 우리는 이렇게 통일성에 입각한 세계를 본다. 세줄요약의 시대는 깔끔한 필연성을 추구한다. 간결하고 손쉽다. 하지만 때로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관계의 그물망에 집중해 볼 수도 있다. 우연히 배치된 모양새를 설명하려면 우리는 그저 온갖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복잡하게 얽힌 타래를 그대로 보여주려면 최대한 이리저리 주변을 샅샅이 살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명쾌하게 요약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렇게 아주 두꺼운 분량의 책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세계 끝의 버섯』은, 버섯 채집을 매개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관계 맺고 있는 배치를 살피고 리듬을 읽는다.



작가는 북미에서 출발해 중국과 일본을 넘나 든다. 송이버섯과 세상의 상호작용을 살피고 이를 패치처럼 유려하게 엮어낸다. 또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가 어떻게 공존하는지 살핀다.

어떤 채집인들은 흙의 모양새가 맞아 보이는 곳에 관심을 가지며 그 흙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더 자세하게 알려달라고 하면 그들은 항상 곤란해한다. 아마도 내 질문에 피곤해진 듯한 어떤 채집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알맞은 종류의 흙은 송이버섯이 자라고 있는 곳에 있는 흙이다. 분류는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담론은 한계가 있다.

『세계 끝의 버섯』 p. 432



버섯 채집은 자본주의적 준거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채집은 경제수단 이상이다. 공연이자 춤이다. 감각적인 활동이고 열정적인 드라마이다. 저자가 만난 일본계 미국인 공동체 원로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다. 그는 거동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송이버섯을 선물하는 기쁨으로 버섯을 채집하기도 했다. 이때, 버섯은 기억의 매개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버섯을 향한 인간의 발걸음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 작가는 버섯 채집 지역에서 보고 듣고 직접 체험하며 비자본주의적 중첩을 살핀다. 인간 단일종에 국한하지 않고 풍경, 나무, 숲, 시장, 역사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책을 읽는 중에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우연히 방문했던 절에서 안내 문자메시지가 왔다. 메시지 말미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이 세상에 그 어떠한 것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 상호작용하면서 존재합니다."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며 방금까지 읽던 『세계 끝의 버섯』 책을 물끄러미 본다. 두 개의 텍스트가 우연히 만나서 다성음악처럼 배치된다. 버섯에서 배운 상호배치의 관점은 불교적 시각과 상통한다. 불교 철학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성은 연기법(緣起法) 이라 부른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연기법을 다양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한다. 모든 존재는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다. 그 결과 생성되는 모든 인간 및 비인간 존재를 오온(五蘊)(색-물질, 수-느낌, 상-생각, 행-행위, 식-판단)의 집합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오온은 내가 바깥과 만난 결과물이다.



작가가 미엔인 채집인들과 버섯 채집을 하고 나서 점심 먹는 장면은 섬세하고 복잡하게 아름답다.

점심시간에 우리는 통나무에 앉아 비닐봉지에 싼 밥을 꺼낸다. 오늘 우리의 반찬은 빨간색과 초록색의 양념을 묻힌 작은 갈색 덩어리로 만들어진 잉어다. 감질나게 풍부하고 매운맛에 나는 어떻게 만드는지 묻는다. 팸 초이는 "생선에 소금을 쳐요"라고 설명한다. 그가 더듬거리며 말한다. 그것이 전부다.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금에 절인 날생선을 손에 들고 부엌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한다. 언어는 한계에 도달한다. 요리하는 요령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몸으로 하는 공연에 있다. 분류라기보다는 춤에 더 가까운 버섯 채집도 마찬가지다.

『세계 끝의 버섯』 p. 442



위 내용을 읽자마자 공연의 차례가 나에게로 넘어온다. 나 또한 우연히 낯선 부엌에 들어선다. 어느 시대인지 어느 지역의 부엌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서 있는 곳은... 음악에 비유하자면 셀 수 없이 많은 성부로 이루어진 다성음악의 내부이다. 이 부엌은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이 뚜렷하지 않다. 그저 무수한 갈래의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소금에 절인 생선을 들고 어쩔 줄 모르겠는 내가 있다. 축축하다. 기나긴 버섯 채집 여정을 함께한 결과 생겨난 나의 수, 상, 식이다. 내 손에 담긴 생선을 바라본다. 손에서 물이 떨어진다. "끝맺기를 거부하는 이 책은" 나를 통해 이렇게 되풀이된다. 조금은 당황스럽지만 호기심과 흥분이 가득한 채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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