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x y z
와타나베 선배는 요즘 뭐해요?
그의 언어는 어딘가 서정적이고 어떤 의미에선 섬세하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와타나베는 유유정 선생님의 언어로 짜인 옷을 입고 있다. 나이가 들어 슬픈 것이 있다면 늘어가는 주름살과 뱃살이 제일 먼저 떠오르겠지만 정말 슬픈 건 일상의 대부분의 대화가 피상적인 이야기로 채워진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내가 꿈꾸는 이상도, 나를 울린 음악이나 영화, 철학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널어놓던 맥주집이 그리운 밤이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사라진 스터디 모임이나 사적 모임을 대신해 유튜브와 브런치가 소통의 창구가 되었다. 그들의 지적이고 유쾌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거울신경 세포 덕분에 나 역시도 그들과 함께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리고 댓글을 통해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간접적으로 마음을 나눌 수도 있었다. 코로나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섬처럼 집안에 고립된 나에겐 느슨하게 연대할 수 있는 그들이 있어 참 다행이다.
당신의 두 세계
우리를 이루고 있는 세계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모나 경제력처럼 표면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내면의 세계가 될 것이다. 뇌가 섹시하다는 말처럼 세계관이 멋진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예술품처럼 은은한 빛을 낸다. 똑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문장과 행간은 끝이 살아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예술에 대한 가치도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우리가 가진 생물학적 한계를 생각해보면 외형적 자산의 감가상각은 분기점을 지나면 급격하게 빨라진다. 여전히 젊음이 가진 파동의 싱그러움에 넉을 놓고 감탄하기도 하지만 마흔이 넘은 나에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런 면에선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가진 와타나베는 꽤나 매력적인 사람이다.
나의 경우 한글로 번역된 하루키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는 것인지 변역가인 유유정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이 아닌 '상실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을 때 마음에 이는 물결이 좋다. 놀라운 사실은 유유정 선생님은 유정이라는 이름의 1922년 생 남자라는 점이다. 100년 전 태어난 남자의 손 끝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와타나베가 완성되었다니 생각할수록 더욱 생경하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면 이와 같은 문장을 품을 수 있을까. 호기심으로 네이버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았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스테리한 점까지 완벽했다.
하루키의 취향을 닮은 와타나베
시큰둥한 저 말투. 모든 것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듯 한 저 태도. 분명 와타나베는 좋은 남자는 아니다. 마약 후배가 그와 연애 중이라면 나는 결혼은 좀 더 생각해보라고 조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흔의 기혼자의 경험을 비추어볼 때 그는 안정적인 배우자가 되기에 위험한 요소들을 다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속 신경이 쓰인다. 매력의 사전적 의미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라고 했던가. 모든 것이 경제력으로 수렴되는 현대 사회에서 결혼정보회사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남자는 아닐지라도, 그는 20년이 지나 난 지금에도 문득 기억나는 지극히 나의 취향을 듬뿍 담은 상상 속 첫사랑과 닮았다.
영상을 기반으로 한 요즘 시대의 메시지는 빠른 도파민 분비를 위해 노골적일 뿐만 아니라 꽤나 일차원적이다. 내가 얼마나 섹시한 몸을 가졌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지, 내가 얼마나 어려운 책들을 읽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을 전시한다. 그 결과, 성공적인 퍼스널 브랜딩 공식처럼 이름을 숨기면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비슷한 콘셉트의 채널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진화심리학자의 관점으로 볼 때 아름다움의 추구와 높은 사회적 지위의 추구는 경쟁력 있는 배우자를 찾기 위한 당연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우리는 아기와 동물, 아름다운 얼굴에 반응해 옥시토신이 분비되는 메커니즘을 가졌고 눈물도 버스보다 벤츠에서 흘리는 편이 훨씬 덜 초라하다. 그럼에도 대화의 희열이라는 단어의 조합처럼 분명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가 통할 때만 발견되는 제3의 신세계가 존재한다. 내게 유유정 선생님의 글이 그랬다.
당신의 x, y, z
우리는 다분히 일차원적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종 아들의 TV를 통해로블록스 게임을 보면서 우리 역시도 서로 다른 맵 상에 존재하는 VR고글을 쓴 참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것만큼 보이니 보이는 것도 다르고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깊이도 다른다. 동일한 자극에도 다른 해석을 하고, 그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세계관도 다르다. 그 결과,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의 폭과 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삶은 우리가 선택한 기억의 조각으로 만든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때문에 나는 경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경험으로 인한 감정의 경험이 인생의 진짜 핵심이 아닐까 한다. 추억의 재료가 되는 우리의 기억은 감정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만 보아도 3명의 변역가의 내면을 지나 변역가의 언어로 재구성되는 순간, 원본과는 다른 미묘한 차이가 만들어진다. 하물며 우리는 어떨까? 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함수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함수를 통해 경험의 가치도 변하고 사람의 가치 역시 각자의 함수를 통해 달라진다. 나에게 매력적인 사람이란 나의 함수에서 최댓값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은 내가 가진 함수의 풍부함과 영민함이다.
담백한 파동
퍼스널 브랜드란 말이 식상해질 만큼 만들어진 이미지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도파민이 자극되도록 인위적으로 부나 아름다움, 감성 등을 과장한 수많은 피드 속에서 내 삶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21세기엔 그것이 하나의 성공 공식임을 알기에 가끔은 성공적으로 브랜딩을 완성한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꾸밈없는 사람이 가진 담백한 파동이 좋다.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내면이 단단한 사람을 만날 때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세계가 비슷한 사람을 만날 때의 희열은 그 어떤 경험보다 소중했다. 나는 아들이 그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의 나이테를 경험했으면 좋겠다. 첫사랑의 그 몽글한 마음도, 유년시절의 진한 남자들의 우정도, 미친 듯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도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인생의 선물이니깐. 나는 아들이 그 모든 과정에서 다양한 폭과 높이를 가진 마음의 파동을 경험하며 풍부하고 영민한 함수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 가끔 빈약해진 나의 취향들을 마주할 때면 엄마로서 부인으로서의 역할에 매몰되어 나의 개인적 삶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렇게 좋아하던 옷도 TPO가 사라진 코로나 시대에선 생필품이 되었다. 아들 유치원 등원 길에 입는 아이보리 코듀로이 팬츠에 회색 나이키 후드티와 밝은 회색의 짧은 패딩점퍼가 현재 나의 겨울 교복이다. 늘 먹던 음식, 유치원 뒷산 집 코스의 단조로운 생활공간, 익숙한 포맷의 자기계발서적 뿐인 삶 속에서 나는 한 명의 무미건조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분명 마흔에게 주어진 경험의 나이테가 있을 것이다. 오늘 밤 오랜만에 맥주를 한잔하며 와타나베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