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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Dec 07. 2021

숫자로는 담을 수 없는 당신

당신은 제품, 상품, 혹은 작품인가요?

우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 중 하나는 집이다. 마흔이 넘은 내 기억 속 첫 집은 흔히 보루코라고 불리는 콘크리트 벽돌로 지어진 단칸방이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초록색 커튼 사이로 초콜릿색 알루미늄샷시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옥 아궁이 높이의 난방을 위한 연탄보일러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엔 소박한 찬장과 석유풍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싸구려 광택이 나는 비키니장 하나가 서있는 단출한 풍경이 나온다. 7살이었던 그 시절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세대주택이었던 첫 집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흐릿하게나마 내게 남아있다.


그 후 나는 국민학교 1학년인 1988년에 인근 신도시에 지어진 주공아파트로 이사해 그곳에서 2002년까지, 초중고 그리고 대학 2학년까지 살았다. 처음 만난 아파트는 신세계였다. 화장실도 밖에 있던 첫 번째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쾌적했고 따뜻했다. 무엇보다 아파트엔 약속 없이도 언제나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놀이터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고무줄놀이도 하고 잡기 놀이도 하며 해가 질 때까지 신나게 놀았다. 나의 친구들은 나와 같이 13평 15평 주공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에 3차까지 지어진 그 주공아파트는 우리 모두의 집이었다.


처음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던 그 시절 엄마는 큰 맘을 먹고 오빠에게 컴퓨터를 사주셨다. 펜티엄인지 486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학창 시절 오빠와 싸워가며 컴퓨터를 차지하는 날이면 하이텔에 접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 채팅이었지만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만나는 것만으로 그 시절 그 어떤 것보다 흥미로웠다. 그곳에서 서울에 사는 친구도 만나고 제주도에 사는 친구도 만날 수 있었다. 지지찍 소리와 함께 요란한 연결음을 뒤로하고 맘에 드는 방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어디에 사는지 묻곤 하는데 나는 서울도 아니고 부산도 아닌 한 번의 설명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지방에 산다고 말하는 것이 점차 부끄러워졌다. 사는 지역은 어느새 계층이 되어 10대인 나의 무의식에도 수치심을 만들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방에 사는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다 지방에 산다는 프레임으로 먼저 전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했던 곳은 압구정에 위치해있었다. 본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욕심 하나로 지방에서 상경해 보증금 1000 원에 월세 50 원의 원룸을 7호선 남성역 근처에서 구하며 시작했던 서른의 서울살이에서 나는 런던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2005 남성복 디자이너로 부산에서 일하며 서울로 출장을 오가며 느꼈던 감정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동일해 보이지만 결코 서로 섞일  없도록 투명한 막이 나를 구분 짓는 느낌이었다.


우리 브랜드는 홈쇼핑에도 진출해있어 가끔 부산에서 서울로 방송 지원을 갔다. 목동역에서 내려 롯데홈쇼핑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며 만나는 풍경은 너무나도 위화감이 들었다. 지금처럼 SNS가 흔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부산에선 볼 수 없었던 외제차며 잘 정돈된 대단지 아파트 라인을 볼 때면 나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어른이 된 나에겐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숫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2005년 당시 연봉 2800만 원을 받는 내가 공시지가 1억 도 되는 않는 빌라에 사는 사회 초년생으로 느끼는 보통의 감정이 아닐까 한다. 서울로의 출장은 가끔 있는 일이고 나의 본진은 부산이라 잊고 있었던 그 묘한 열등감은 서울로 이직하면서 매일 마주하게 되었다.


압구정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가는 길엔 몇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일찍 도착하는 날이면 나는 큰 대로변으로 부동산 가게들이 즐비한 길을 걸었다. 2011년 당시 8억이라는 숫자는 내게 신기루 같았다. 타지에서 4000만 원 남짓한 연봉을 받는 내가 감히 꿈을 꿀 수도 없는 숫자였기 때문이다. 지금 압구정 현대의 가격과 비교하자면 귀여운 숫자지만 나는 여전히 그 생경함을 잊을 수 없다.


집은 어린 시절 우리가 가지고 싶어 했던 나이키 운동화와 같을 수 없었다. 학창 시절 기껏해야 용돈으로 남포동 뒷골목에서 2~3만 원 하던 짝퉁 나이키 운동화를 살 수밖에 없던 나였지만 지금 아들 운동화는 꼭 나이키를 구입한다. 여전히 내 눈엔 나이키 운동화가 제일 예쁘기도 하지만 어쩌면 대리만족 중인지도 모르겠다.


2013년 나의 신혼집은 전세자금 6800만 원으로 구한 20년이 넘은 한 동짜리 아파트였다. 그중에서도 3000만 원은 신혼부부를 위한 대출이었다. 대학 선후배 사이였던 우리는 정말 나이브(naive)하게 결혼을 했다. 한 곳에서 진득하게 일하며 돈을 모으지 못한 나와 서른 살까지 고시공부를 한 남편이었기에 인스타 속 예쁜 신혼집은 꿈도 꿀 수는 없었지만 서로가 얼마나 치열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왔는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배우자가 있었기에 우리의 가난은 불행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아들이 태어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여전히 사는 동네는 우리의 계급이 되었고 그 속엔 묘한 감정들이 공존했다. 병원을 가서 주소를 적을 때도 그랬다. 아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인간관계가 성형되는 동안에도 오롯이 내가 아닌 나는 내가 사는 동네 혹은 내가 사는 아파트로 존재했다. 부동산 카페만 가봐도 일반적으로 우리가 처음 본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경험할 수 있으니 이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네이버 부동산만 들어가 봐도 우리가 사는 아파트 가격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마흔쯤 되면 친구들 사이에서도 경제력을 중심으로 힘의 균형을 다시 잡는다. 연봉뿐만 아니라 재테크가 필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모든 의미를 대신하게 되는 현실이다. 대기업 건설사의 국평아파트에 살면서 그랜져급 이상의 차를 모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중산층의 외형이 되었으니 말이다.


분명 우리의 삶 속에선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시장에서 선택을 목표로 한 제품 혹은 상품처럼 숫자의 가치로 평가하며 서로에게 등급을 붙이며 우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한 번도 주류가 되어보지 못한 변방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느끼는 이 이질감은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동일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왜 서른 살에 결혼을 하면서 집을 사지 못하는 것에 열등감을 느껴야 하며 20년이 넘은 중고차를 타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어야 할까.


인생을 나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살아가는 법의 첫 번째는 비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취향은 결코 가성비로 만들어질 수 없다. 투자 대비 가장 완벽한 아웃풋을 목표로 한다면 인생은 효율적 일지는 몰라도 결코 당신만의 멋을 담을 수는 없을 것이다.


20대 초반 나는 대학 선배였던 지금의 남편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숫자로 평가되는 남편은 낙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훗날 내가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던 이유는 한결같은 친절함과 다정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한 번에 금연에 성공한 사람이다. 본인이 한 말에 대한 책임감 있는 모습은 진짜 어른 같았다. 대학 등록금을 휴학하고 스스로 마련해야 할 만큼 여유가 없었던 남편은 그 인고의 시간 동안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서른까지 준비했던 시험을 포기하고 뒤늦게 시작한 회사생활이지만 자신만의 속도와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는 중이다.


남편은 2014년 지인으로부터 받은 1999년 생인 소나타를 보내고 작년부터 아주버님 친구분으로부터 받은 2008년식 뉴스포티지를 타고 다닌다. 주변에선 차를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고 난리다. 남편이라고 왜 좋은 차를 타고 싶지 않겠는가. 왜 친구들의 새 차가 부럽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매주 이 오래된 자동차를 타고 가족여행을 떠난다. 가끔은 시부모님을 모시고서 떠날 때면 이런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남편은 어머님께 좋은 벤츠(아주버님 차) 두고 우리 똥차 타고 다니냐고 우스게 소리를 하면 어머님은 벤츠보다 이 똥차가 더 편하다며 웃으시며 대답하시곤 했다. 행복을 담는 그릇에는 가격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성실함은 본인만 알 수 있다. 내 삶을 평가하는 많은 지표들 중에서 타인에게 보기 좋게 내놓을 수 있는 숫자 말고 내 삶을 관통하는 진정성 말이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타인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게 하며 내 삶의 밀도를 반추할 수 있도록 하는 거울 말이다. 스펙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낸 빛나는 숫자보다 자기다움의 투박함이 어쩌면 더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완벽한 선택이 아닐지라도 나다울 수 있는 용기는 매 순간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마흔에도 그런 용기를 가지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힘들더라도 나다움을 잃지 말라고. 숫자는 당신을 전부 담을 수 없다고. 삶은 두려움과 조바심으로 찍어내듯 만든 미투상품이 아니라 당신만의 결을 새긴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라고 매 순간 흔들리는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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