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백 없는 일방적인 호감은 부담스럽다.
결론부터 말하자. L군의 짝사랑이 이뤄질 확률은 희박하다. L군이 그녀보다 어려서,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L군의 계획은 너무나 일방적이며 현실성이 없고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L군의 연애경험이 너무 적다 보니 호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거다. 그녀와 사귀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그녀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마저 잃지는 말자. L군은 아직 연애를 조금 더 배울 때다.
저는 같은 회사, 같은 부서의 한 여성분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알아가게 된다면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보다 4살이 많으신 점이 좀 걱정되지만 꼭 잘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짠 플랜은, 올해 크리스마스까지 친해지고 호감을 간접적으로 나마 표현하다가 크리스마스 전전 날인 23일 날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합니다.
일단 말문이 막힌다... 이제 입사한 지 한 달 된 사람이... 평소 말 한마디 해본 적 없는 선배를 보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계획을 세우다니... 여기까지만 읽어봐도 L군의 앞으로의 전개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평소에는 한마디 말도 못 하다가 사내 메신저나 혹은 우연히 얻은 연락처로 진한 감정이 담아 궁서체로 이런저런 말들을 건네고 결국 L군 본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에 다다르면 "사... 사실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어요!"라며 뜬금 고백을 날려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겠지...
L군과 같은 짝 러버들의 가장 큰 문제는 피드백이 없다는 거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나 좋아하지 않나를 계속 고민하는 것도 문제지만 다 덮어놓고 고백 계획만 짜는 짝 러버도 참 답이 없다. L군아 본인이 원치 않는 호감을 받는 것이 때로는 부담을 넘어 불편함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자.
파티를 진행하다 보면 L군과 같은 짝 러버들이 가끔 만나게 되는데 곁에서 보고 있으면 너무 안타깝다. 이제 막 자대 배치받은 신병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XX 씨는 참 예쁘시네요.", "저도 XX 씨와 생각이 같아요. 우리 참 잘 맞는 것 같은데요? 하하",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제 스타일이시라 호감이 가네요" 등의 진부하면서도 부담스러운 멘트들을 던지며 상대를 불편하게 하곤 한다.
연애는 피드백이다. 나에 대한 상대의 호감에 살짝 반발짝씩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우면서 상대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접근법이다. 이는 단순히 유혹 스킬이 아니라 에티켓이다. L군도 한번 생각해보자. 생전 생각지도 않았던 심지어 L군의 스타일도 아니었던 직장동료가 대뜸 고백을 했다면 L군의 기분은 어떻겠나?
물론 침대에 누워 선배가 L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백날 고민하라는 게 아니다. 회사에서 만났을 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회식자리에서 이런저런 질문의 던지며 선배의 피드백을 관찰하고 그 수준보다 살짝 반발짝씩만 전진을 해보라는 거다. 선배가 "주량이 어떻게 돼요?"라고 물으면 "예쁜 여자랑 마시면 절대 안 취해요~ㅎ"라며 슬쩍 칭찬과 함께 호감을 전달하며 그에 대한 피드백을 또 관찰해보란 거다.
L군이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에 푹 빠져서 혼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기 전에 기억하자. "선배 입장에서 L군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남자일 뿐이다."
하필이면 자리도 좀 많이 멀리 떨어져 있고... 제 성격이 그리 적극적인 편도 아닌지라... 저번에 회식자리에서 어디 사냐고 물어보시길래 노원 쪽 산다고 말씀드리고 뭐 그 대화 이후론 거의 대화도 못해봤네요...
L군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왜 저렇게 부정적이야? 왜 난 안된다고만 하는 건데!?"라고 기분이 좀 상했을 수도 있다. 미안하지만 옛말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고 하지 않던가? 연애도 마찬가지다. 될 것 같은 인연이었다면 초반부터 스파크가 튀기 마련이다. 심지어 초반에 파바밧 스파크가 튀겨도 흐지부지되기가 부지기수인데 스파크가 튀기긴커녕 대화 자체가 없는 이 상황에서 무슨 달콤한 로맨스가 이뤄지겠는가...
물론 L군이 바라는 판타지에 장단을 맞춰주자면 "L군! 일단 응원의 메시지가 담긴 포스트잇을 붙인 음료수를 건네 봐요! 그때 슬쩍 손을 터치하며..." 따위의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겠다만... 너무 현실적이지가 않다...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에서 여주인공인 시후미는 토오루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사람과 사람은 말이야, 공기로 인해 서로 끌리는 것 같아. 성격이나 외모에 앞서 우선 공기가 있어. 그 사람이 주변에 발하는 공기. 나는, 그런 동물적인 것을 믿어."
만약 L군과 선배가 인연이 있었거나 L군이 선배를 충분히 유혹할 수 있었다면 L군과 선배는 서로의 공기에 이미 끌리고 있었을 거다. "선배와 썸이 좀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행동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가 아니라 "좋아하는 선배가 있는데 선배를 어떻게 유혹하죠?"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L군과 선배의 로맨스는 현실성이 희박하다는 소리인 거다.
바로님의 글을 읽어보니... 먼저 친해져야겠더라고요. 문제는... 제가 여자와 친해지는 것을 잘 해내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연애도 지금껏 딱 한 번밖에 못해본 터라... 또 제 성격이 워낙 소심하고 낯을 가리기도 하고... 여자 앞에서는 더 소심하고... 그렇지만 이제 저도 이 성격에서 벗어나서 저의 장점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사실 지금 L군의 플랜은 이제 막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놓고 다음 달에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 나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과 같다. 아직 이성에게 농담을 던지는 것도 어려운 L군이 이렇다 할 썸도 없는 여자를 유혹하겠다는 플랜은 정말 아니다.
내가 뭘 하고 싶냐도 중요하겠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냐도 중요한 거다. 좋아하는 사람을 눈 앞에 두고 포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이 아프긴 하겠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남들 다 연애할 때 연애에 관심을 두지 않고 다소 저 멀리 뒤처진 L군의 탓이지 뭐...
선배를 포기하고 선배 근처도 가지 말라는 건 아니다. 다만 플랜을 조금 수정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거다. 사내 메신저로 감정이 잔뜩 담긴 궁서체 멘트를 날리거나, 뜬금없이 크리스마스에 고백을 해서 선배와 연애를 하겠다는 플랜보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적당한 칭찬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부담스럽지 않게 선배와 친해지는 그런 플랜으로 말이다.
나에게서 긍정적인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작은 팁이라도 얻고자 했을 텐데... 대놓고 반대만 해버린 것 같아 미안해. 어쩌면 L군은 "바닐라 로맨스는 나의 사랑을 무시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난 L군을 무시한 게 아냐 다만 생각이 좀 다를 뿐인 거야.
난 사랑이라는 게 내 이상형인 사람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이 아니라 연애를 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상대가 내게 해준 것에 감사해하고 나 또한 이것에 대해 보답을 하며 천천히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런 내 기준에 봤을 때 L군의 지금 상황은 사랑이라기보다 끌림인 거야. 그런데 L군이 호감에 대해 너무 흥분을 하고 긴장을 하니까 내 눈엔 너무 불안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거고
난 L군이 좀 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 첫 연애가 늦은 건 사실이지만 아직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내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들겠어!"라는 생각보다는 당분간은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싶어!"라는 생각으로 사람들과 친해지는 법을 연구해보는 건 어떨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방법만 연구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과 빨리 친해지는 방법을 연구하는 편이 앞으로의 L군의 연애 생활은 물론이며 대인관계가 풍요로워질 텐데 말이야. 딱 두어 달 정도만 내가 말하는 대로 해본다면 좋을 텐데! 어쨌든 L군아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