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개인적으로는 다독가까지는 아니지만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심리, 인간관계, 스피치, 마케팅 쪽 책을 많이 읽긴 하지만 가끔 서점에 가면 느낌 가는 대로 한아름 책을 가져오곤 한다. (설마 훔쳐온다 생각하지 않겠지...?)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건 똑똑해 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무엇인 가를 읽는 것을 좋아해서도 아니라 단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대로, 재미가 없는 건 재미가 없는 대로 그냥 주욱~ 하고 끝까지 읽어버린다. 그러면 적어도 하나 두 개 정도는 마음에 남는 구절이 있기 마련인데 그 남는 구절은 분명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그 와 같은 맥락에서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재미있고, 어떤 사람은 재미없고, 또 어떤 사람은 불쾌하기도 하지만 어떤 대화든 나는 끝까지 하다 보면 뭔가 배우는 게 있고 내게 도움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쯤 파티였을 거다. 베이지색 앙고라 코트에 (엄청 따뜻해 보여서 빼앗아 입고 싶었다!) 흰색 앙고라 니트까지 앙고라로 무장한 자그마한 여자분이 조용히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 내게 아무런 어필을 하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용기 내서 왔지만 막상 처음 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어려워요... 오빠가 좀 도와주세요..."하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다. ("오빠가 좀 도와주세요..." 이런 뉘앙스를 느끼다니... 나도 참...)
자그마한 얼굴에 수수한 화장을 하고 온 그녀에게서는 '쉽게 농담을 던지기가 어려운' 순수함을 느꼈는데, 아마도 그런 느낌 때문에 다른 남자 게스트들이 쉽게 말을 걸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뒤에서 양 어깨를 툭! 하고 잡았다. (내 등장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놀란 그녀를 안심시키며 옆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대부분의 물음은 기본적인 호구조사와 함께 그녀의 관심사를 탐색하는 질문들이었는데 솔직히 객관적으로 말을 하면 그녀는 좀 지루한 스타일이었다. 뭔가 어떤 감상을 묻는 질문에는 어색한 답변만 늘어놓는 스타일... 그래서 주제를 바꿔서 그녀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녀는 영국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마치고 영국 쪽 로펌에서 일을 하다가 몇 달 전 출장으로 한국에 왔다고 했다. (물론 급당황... 난 영어 잘 못하는데...) 물론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긴 했지만 일 얘기를 하니까 중간중간 전문용어에 대해 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하니 이건 뭐... 대화인지 영어 듣기 평가인지...
나는 그때마다 "오!? 방금 그 말이 무슨 말이에요~?"라며 작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영국 로펌에 관심이 있어서? 물론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또 내가 언제 영국 로펌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겠는가? 나는 또 묻고 또 물었다. 동양인으로서 힘들지는 않은지, 혹시 영국 로펌에 다니는 여자들은 어떤 로맨스를 꿈꾸는지, 일을 하며 가장 뿌듯할 때가 언제인지, 기억나는 사건은 무엇인지 등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녀는 나와의 대화가 편했는지 자꾸만 영어를 더 많이 사용하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들을 자연스럽게 내게 말해줬다. (기억이 잘 안나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찡긋 인상을 쓰면서 어깨를 들썩하는 게 참 귀여웠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주위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화는 멈춘 채 조금씩 그녀와 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항상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쪽에 관심이 많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소개를 주위 사람들에게 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20여분의 시간을 투자해서 '영국 로펌에 다니는 여자'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다.
에~ 그런 걸 어따써! 할지 모르겠다. 뭐... 당신에게는 쓸모없는 정보일지 몰라도 난 지난 1년간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다. 가끔 파티 혹은 모임에서 변호사나 로펌에서 일하는 사람 혹은 영국에서 유학을 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뻔한 질문 "영국에서 뭐가 좋았어요?"라는 질문이 아니라 "영국은 이렇다던데 본인은 어땠어요?"와 같은 질문으로 보다 빨리 상대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당신이 앞으로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될지,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대화를 나누게 될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구와 어떤 목적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든 일단은 대화 자체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상대와 공감대가 없어서, 상대가 예의가 없어서, 상대가 재미없어서, 분위기가 어색해서 등등 당신이 상대와 즐겁게 대화를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무궁무진하게 많을 거다. 그럴 땐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을 하고 스윽~ 하고 뒤적거려 보자. 앞서 말했듯 어떤 책이라도 분명 한두 구절은 당신의 마음에 들게 되어있고 당신은 그 구절에 집중해서 읽어보면 되는 거다.
이런 대화는 상대방에게는 "어!? 이 사람과 뭔가 통해!"라는 뉘앙스를 주고 또 당신에게는 당신이 알지 못했던 어떤 정보를 알 수 있게 도와줄 거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니! 한 번쯤 모두 훑어보고 싶지는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