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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Feb 25. 2022

내 마음에 오로라가 뜨는 날

책의 공간에서


긴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머무는 우연한 순간들.


그렇게 써 내려가는 서사의 행간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이 얼기설기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나와 책은 어떤 실로 연결되어 나를 서점 창업의 길로 이끄는 것일까.



  

어릴 적부터 내 선물의 선택은 언제나 '책'이었다. 생일선물도 마찬가지. 평소보다 두어 가지 특별 반찬이 더 차려진 생일 밥상을 비우고 부모님을 따라 길을 나선다. 시장 끝에 있는 우리 집에서 부지런히 걸어 시장을 가로지르면 또 다른 끝에 서점이 있었다. 도착한 서점 안을 한참 둘러보고 딱 한 권의 책을 골랐다. 그렇게 다시 시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길 위에서 나는 선물로 받은 책을 다 읽어버린다. 집에 도착해서 다른 책을 사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나, 그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척 아쉬워서 심장이 찌릿찌릿했던 기분만 기억에 남아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들과 뛰어놀던 기억보다는 방 한구석에 앉아 책을 펴 들고 온갖 공상을 펼치던 기억이 더 많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6년 내내 생활기록부에 기록된 대로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나 보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책 대여점이 많았고 나도 우리 집 앞에 있는 책 대여점 단골이었다. 빌린 책을 다 읽고 새로운 책을 빌리러 갈 때 무척 신났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그 시절 나에게 책은 지치지 않고 맘껏 놀 수 있는 놀이터였고, 큰 나무 아래 살랑거리는 고요한 그늘이었다. 부모님의 부부싸움 언성이 높아져도 나는 이불속에서 책 그늘을 품고 읽었다.


그 이후로도 책은 나에게 충실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말은 없지만 조용히 내 곁을 지키는 그는 잠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수다쟁이 친구였다. 남자 친구와 헤어져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서점을 찾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의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그날, 책의 공간 속, 쏟아질 듯 조용히 넘쳐흐르는 책등의 글자들이 위로가 되었다.


회사 사무실에는 항상 책 한 권을 얹어두었다. 불편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은 날이나 괴롭고 지쳐 넘어질 것 같은 날에는 그 책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책을 펼쳐 읽지 않아도 책등의 제목을 바라보거나 표지를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위로가 되는 감각이었다.




곧 남편의 창업을 앞두고 큰돈이 들어갈 일만 남았다. 아끼고 또 아껴야 하는 시점이다. 그래서 요즘은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 읽고 그중에 정말 갖고 싶은 책만 사려고 한다. 그마저도 몇 번을 더 고민한다. 나에게는 책 읽는 사는 일이 최고의 플렉스인데 그게 힘들어지니 여간해서 스트레스 풀기가 쉽지 않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얼마 전, 도서관 책들을 반납하러 가야하는 날이었다. 빌린 책 중에 '아, 이 책은 갖고 싶은데..' 하면서 여러 번 만지작만지작 거린 책이 있었다. 책 반납기한이 다가왔고 연장까지 했는데 다 읽지 못했다. 다음에 다시 또 빌리면 되겠지만 그래도 그 책은 돌려줄 일 없이 내 곁에 두고 언제든 어느 페이지든 쓱 펼쳐 읽고 싶었다. 살까 말까 고민하면서 도서관으로 출발하던 참이었다.


집을 나서다가 글방 친구에게 온 택배박스를 발견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후루룩 박스를 열어보니 오로라 같이 초록빛 푸른 리본을 곱게 휘감은 책이 있었고, 친구가 만든 소중한 사진책과 달력, 따뜻한 손글씨 카드도 들어있었다. 어릴 적 간식 종합세트를 받아 든 것처럼 신나게 선물을 하나하나 꺼내보다가..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너무 놀라서 멍해졌다.


내가 아까 도서관에 반납하기 싫어서 한참을 만지작거렸던 그 책이 여기 들어있었다. 갖고싶던 그 책이 나에게 온 것이다. 친구와 나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끈이 꿈틀거리며 내 마음을 잡아 당기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 마음에 오로라가 떴다.




내가 채워나갈 서점의 책장이 누군가에게 이런 마법 같은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누군가의 마음에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오로라가 뜰 수 있도록 설레는 순간의 시간, 그리고 문장을 선물하고 싶다. 책과 함께 언제든 어디로든 잠깐 여행을 다녀올 수 있고, 괴로운 일이 조금 잊히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간 마음을 다시금 품게 만드는 곳.  누군가의 일상 한켠에 그렇게 존재하는 서점이었으면 좋겠다.


이따금 당신과 나, 그리고 책 사이에 분명 존재하는 그 보이지 않는 끈이 우리 마음을 슬며시 잡아당기기는 그런 날도, 종종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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