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으로 충분하다

#115

by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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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으로 충분하다

by 서하


씨앗은 흙을 품는다

흙은 씨앗을 품는다

씨앗도 모른다 언제 싹이 틀지 어떤 꽃을 피울지

다만 흙을 품고 흙에 품긴 채 오늘 하루 조금씩 부푼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새는 하늘을 품는다 날갯짓마다 바람을 품는다

그리고 하늘은 새를 품는다 떨림까지 품는다

새도 모른다 내일 어디로 날지 언제 둥지에 이를지

다만 하늘을 품고 하늘에 품긴 채 오늘 하루 한 번 날아오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당신을 품는다 떨리는 손으로 쟁기를 잡듯

그리고 당신은 나를 품으신다 휘어진 고랑까지 품으신다

나도 모른다 내일 어디로 갈지 언제 완전해질지

다만 당신을 품고 당신께 품긴 채 오늘 하루 작은 사랑 하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씨앗은 흙에게 묻지 않는다 새는 하늘에게 묻지 않는다 나도 당신께 묻지 않으리

품고 품기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하다


모티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루카 9,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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