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프 여행의 시작
'아... 쉬고 싶다'
매주 쉴틈 없이 긴장이 연속되는 업무 사이클에 몸이 종종 잔병치레를 시작했다. 올해는 내 몸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신장이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고, 평생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진료까지 받았다. 방송작가로 일해온 10년 동안 마땅한 전문 분야 없이 주어지는 프로그램을 닥치는 대로 해왔는데, 내 것이 없다는 공허함과 진로에 대해 명확한 방향 설정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까지 겹치면서 진짜로 일을 쉬기로 마음먹었다.
고정 수입이 끊긴다는 것은 너무 두려운 일이지만(너무 겁이 나서 최소한의 알바 하나는 남겨두었다) 그렇다고 흘러가는 대로, 굴러가는 대로 달려가기에는 문득문득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맞이할 5년 후, 10년 후의 내 모습이 그다지 내 마음에 들 것 같지 않았다. 시간에 쫓기며, 또 어딘가의 소모품이 되어, 골골대며 약을 달고 살아갈 모습...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방송작가 일은 하려고 마음먹으면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 가능한 편이다. 물론 그러려면 원하는 조건을 좀 내려놓거나, 몇 달 버티자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좀 더 하고 싶은 일이 들어올 때, 일이 하고 싶어 질 때 다시 하자!'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제발 좀 쉬고 싶은 욕구와 맞물리면서 당당히 휴식을 선언하게 했다. 불안감에 달달 볶여서 금세 다시 일을 할 수도 있고, 계속 어긋나서 생각보다 오래 쉬게 될 수도 있는 대책 없는 백수 생활이 볕 좋은 가을날과 함께 시작됐다.
일을 쉬게 되면 하고 싶었던 것들은 많다. 주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안 하던 것을 해보는 일들이다. 특히 가장 하고 싶었던 것들은 위빠사나 명상센터에서 10일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명상만 해본다거나(채식 식단이 제공되어 안성맞춤이다), 우프로 세계 농촌 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명상은 코로나 19 상황 때문에 제대로 이뤄지는 것 같지 않았고, 중도 포기하게 될까 두려움도 있었다. 조금 더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우프 쪽이었다.
우프(WWOOF)는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의 약자로 1971년 영국에서 시작됐다. 유기농가 및 친환경적인 삶을 추구하는 곳에서 하루에 반나절 정도 일손을 돕고 숙식을 제공받는 것인데 우프 회원으로 가입하면 전 세계 150여 국가에서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워킹홀리데이의 농촌 버전이라고나 할까? 어느 날 우연히 친구와 얘기 나누다가 우프에 대해 처음 알게 됐고, 막연한 농촌 로망이 있어서 집어 들었던 책 <우리가 농부로 살 수 있을까>를 통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됐다. (부부가 우프를 통해 여러 나라 농가들의 농사법과 농촌 생활을 경험한 이야기, 재미있습니다 추천!) 친환경적인 삶에 관심이 많고, 도시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이 더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인 나에게는 안성맞춤인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프는 유럽을 중심으로 많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유럽 여행을 겸해서 친환경적인 농가들을 경험하고,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기에 무척 좋은 여행법이다. (+상대적으로 비용도 덜 들고!) 하지만 코로나 19라는 녀석이 두 발을 꽁꽁 묶어놓은 지금, 외국 우프 여행은 언감생심이고... 그래도 다행히 우리나라에도 우프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들이 있다.
우프를 제공하는 어떤 호스트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신청자격을 가지려면 우프 코리아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 우프 코리아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1년간의 회원 자격을 갖는데 회비가 5만 원이다. 순진하게 진짜로 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백수 생활 시작으로 소비심리가 옹졸해진 상황에서 뜻밖의 지출을 앞두고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경험에 비하면 사실 큰돈은 아니기도 하다. 5만 원이 무서워서 하고 싶던 걸 못할 거면 쉬는 동안 무슨 가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겠나! 멈칫했던 손을 머쓱해하며 결제와 회원가입을 마치고 어떤 호스트들이 있는지 쭉 둘러보았다.
채식주의자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등의 세부 사항이 각각 안내되어있으니 호스트에게 사전에 알리고픈 특별사항이 있는 경우는 잘 살펴보고 사전 문의 후 신청하는 것이 좋다. 사실 나는 전부터 찜해뒀던 농가 두 곳이 있었다. 논산에서 '꽃비원 홈앤키친'이라는 팜투테이블 식당을 운영하며 농사를 짓고 계시는 꽃비원, 그리고 위에서 소개했던 책 <우리가 농부로 살 수 있을까>를 쓰신 부부가 자연농 기법으로 농사를 하고 계시는 양평의 종합재미농장이다. 이 외에 더 추가할 곳이 있을까 훑어봤는데 낯가림쟁이에게는 그나마 안면이 있고, 채식주의자도 흔쾌히 반겨주시는 이곳들이 제격이었다. 경험을 해보고 후에 다른 곳에서도 지내볼지는 그때 상황에 따라 고민해보기로!
원하는 농가에 머물 기간, 호스트에게 도움이 될만한 자신의 재능(커피를 잘 내린다거나, 외국 요리를 잘한다거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등등을 적어서 신청메일을 보내면 우프 코리아와 농가에서 각각 답장이 온다. 농가의 일손 필요 현황에 따라 날짜나 기간은 다시 조율되기도 한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본인 사정에 따라 숙박 기간이나 일정 조율이 필요한 경우 숙박 농가에 사전에 알려야 한다.
막상 새로운 경험을 시작하려니 낯섦에 대한 걱정, 귀찮음, 혼란스러움 등의 감정이 한데 엉겨 몰려왔다. 하지만 일을 쉰다는 큰 결정을 대책 없이 한 상황에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미루기는 싫었다. 메일을 보내고 다음 날 때쯤 두 곳에서 모두 답변을 받았다. 9월 말에는 논산 꽃비원에서 6일, 10월 셋째 주쯤에는 양평 종합재미농장에서 5일, 답장 메일까지 모두 받고서 약속을 마쳤다.
이제, 우핑 시작이다!